유럽여행/독일

독일 관광지 정보

壹虛 2008. 10. 10.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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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텐부르크의 관광거리
시의 중심인 마르크트 광장에 있다. 14세기 고딕
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이 절충된 매력적인 건물이다. 높이 60m의 시청사 탑에 오르면 도시와 타우버 계곡의 전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시청사 내부의 관광 안내소는
평일 오전9시- 정오12시까지, 오후2시-오후 6시까지 문을 연다. 토요일에 는 오전 10시부터,
일요일에도 여름에는 오전10시부터 정오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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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르츠부르크의 관광거리 top
독일_뷔르츠부르크_마리엔성_1
독일_뷔르츠부르크_마리엔성_1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이 뒤섞여 있는 성이다. 즉,17세기초에 내부가 르네상스 양식으로 개조되었다가 30년전쟁 때(1618-48) 바로크 양식으로 다시 바뀌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이 성은 원래 켈트족의 요새 및 1201년부터 1791년까지 대주교의 거성이었는 데,이곳의 테라스에서는 마인강과 건너편 시가지를 바라볼 수 있다. 뷔르츠부르크의 전경을 한 눈에 바라다 볼 수 있는 데,그 모습이 무척 아름답다. 또한,이 내부에는 바로크 양식의 무기고를 개조한 마인 프랑켄 박물관도 있다. 이 박물관에는 프랑켄 지방의 미술품 외에도,독일이 낳은 뷔르츠부르크 출신의 천재 조각가인 틸만 리멘슈나이더 작품 '아담과 이브'가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마리안베르크의 식민지는 이미 후기 청동기 시대 때부터 생겨났다. 초기 철기 시대의 중유럽 문화의 시대에는 이곳에서,450년부터 550년까지 캘트족 선제후의 거성으로 쓰였고,또 그리이스의 도자기를 수입하는 거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비로소 704년 경,이 요새는 스코틀랜드의 선교사인 Kilian과의 교섭을 시작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문서에 기록되게 되었다. Konrad von Querfurt(1198-1202) 주교하에 최초로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거 왕조가 세워 졌고,그 후 Herrmann von Lobdeburg (1225- 1254)주교가 집권시에 이 왕조는 끝이 났다. 그래도,그들의 집권시에 Querfurt는 성의 제일 높은 망루를 만들어 세웠으며,Lobdeburg는 두 개의 하늘을 찌를듯한 성의 본관을 덧붙여 만들었다. 이것이 오늘날의 선제후성의 옛부분이다.
뷔르츠부르크에 온 모든 방문객들은 바로 이 마리엔부르크 요새를 꼭 들려 보아야만 한다. 다시 말해,뷔르츠부르크 시의 여행은 마리엔베르크성의 여정 없이는 완성되었다고 할 수 없다. 거닐다 보면 이 곳에는 2개의 박물관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선제후 박물관'과 '마인 프랑키쉐 박물관'이 그것이다.
기원전 1000년 경에는 처음으로 켈트족에 의해 요새의 일부가 만들어 지기 시작했고,AD 706년에는 동정녀 마리아에게 교회를 새로이 지어 헌당하였으며,그와 동시에 목조로 성벽을 쌓아 요새를 만들어 나갔다. 13세기에는 후작 주교의 궁정을 이곳의 요새로 옮기게 되었다. 이것이 최초로 만들어진 요새화된 중세의 성의 기원이다. 1308년에는 Randersacker탑이 처음으로 세워지기도 하였으며,1573년에는 선제후의 저택이 도서관과 겨울을 나기 위한 숙소 등을 건축함으로써,더욱 확장 되기에 이르렀고,장크트 마리아의 탑,그리고 성곽 둘레의 해자등의 시설이 새로이 추가적으로 만들어 졌다.
그러던 중,1613년,스웨덴의 국왕인 Gustav Adolf가 30년 전쟁을 일으켜 이 요새를 공격하였고,1720년에는 선제후의 거성이 도시내의 레지덴츠로 옮겨 가게 되었다. 현재는 이 요새가 완전히 군사적인 목적으로만 쓰이고 있다. 1814년,이 성은 바바리아 왕국으로 이전되었으나,1945년 3월 16일,전쟁중에 공습으로 인해 이 요새의 대부분은 파괴되기에 이르렀다. 그 후,종전 후인 1950년부터 이 요새는 재건되기 시작했고,거의가 회복되어 오늘날의 모습으로 까지 되찾게 된 것이다.


* 가는방법 : 이곳에 가기 위한 방법에는 2가지가 있다. 버스를 이용하여 가거나,아니면 모험심 있는 사람이라면,포도원으로 뒤덮여 있는 Marienberg나 St. Mary언덕의 꼭대기 숲을 걸어 올라가는 것이다. 버스를 타고 갈 경우에는,'Spitale'정류소에서 9번 버스를 타면 되는 데,약 30분간 소요된다. 요금은 일반이 DM 2로서 싼 편이다. 이 버스 승강장은 'Alte Mainbrucke'의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걷고자 할 때에는 언덕의 밑에서부터 숲까지 약 30분 가량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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퓌센의 관광거리 top

 

 

노이슈반스타인 성 전경
노이슈반스타인 성
1869년에 착공하여 1896년에 완공된 성으로서, 디즈니가 디즈니랜드를 건축할 때 모델로 삼았으며, 바이에른의 국왕인 루드비히 2세에 의해서 건축된 곳인데 일명 '신(新)백조의 성'이라고도 불리운다. 오늘도 전 세계로부터 방문객들의 발걸음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이 아름다운 성은, 외벽이 흰 색과 베이지 색의 대리석을 사용해 중세의 중후한 멋을 풍기면서도 무겁게 가라앉지 않고 밝은 색조를 띄고 있다.
날씬하며 우아한 자태로 건축된 이 성의 지붕 위에는 비 대칭적인 여러 개의 푸른 원추들이 예술성을 더하고 있다. 유럽풍 바탕에 아랍의 특이한 문양을 가미한 듯 한, 그야말로 동화 속에서나 꿈꿀 법한 신비한 모습이다.

이 성을 지은 사람은 루드비히 2세인데,그는 당시 독일 남부의 바이에른 왕으로서,1845년 8월 25일에 아버지 막시밀리안 2세와 어머니 마리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감수성이 예민하고 특히 성장하면서 시와 음악,그리고 미술과 같은 예술 분야에 심취하였고 일찍이 건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나중에 이 성을 자신이 직접 설계하게 된 계기가 된다. 1861년 2월 2일 루드비히 2세가 16세 되던 해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관람한 뒤 부터 바그너의 열성적인 팬이 되고 일생의 변화를 겪게 된다. 1864년 타계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약관 18세에 왕위에 오르지만 과거 절대군주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자유화와 자본주의 시대가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새로운 시대가 되어 고전한다. 상황은 예전 같지 않게 되었고 더군다나 그는 정치보다는 예술 세계를 좋아하는 감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궁전이 있는 뮌헨을 가급적이면 피해 남부 지방의 알프스 부근의 전원에 있을 때 더욱 행복감을 느꼈다고 한다. 1870년이 되자 유럽의 정치적인 상황이 러시아와 프랑스간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충돌에 휘말리게 된다. 특히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로 그는 더욱 더 성을 짓는 일에 몰두하고, 반대로 정치에는 흥미와 자신감을 잃게 된다.

그러나, 루드비히 2세는 41세의 젊은 나이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만다. 침실에서 자던 어느 날 새벽 왕은 정적에게 납치당하여 슈탄베르크 호수의 요양소에 강제로 연금을 당하게 된다. 1886년 요양소에 갇힌지 사흘만에 변사체로 발견되었는데, 왕의 죽음은 두 가지로 추정되고 있다. 첫째는 왕의 무능을 보다 못한 정적에 의해 살해되었을 가능성, 두번째는 강제 연금된 자신을 비관해 자살을 시도하였다는 것이라는 추측이지만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그는 살아 생전 성을 세 곳에 지었지만, 그나마 완성된 곳은 신 백조의 성 하나뿐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성 역시 1869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17년 동안 지었음에도 3분의 2밖에는 완성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루드비히가 왕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재산을 모두 털어 지었을뿐만 아니라 때로는 은행 융자를 받거나 돈이 생길때 마다 지었기 때문이다. 해서 루드비히가 죽을 무렵, 성 건축에 따른 빚은 무려 1천 4백만 마르크에 이르렀다. 그렇게 정성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루드비히 2세가 이 성에 살았던 것은 겨우 6개월 정도였다.

이 성은 산 중턱의 명당자리에 자리잡고 있다. 예로부터 규모가 큰 건축물은 호숫가나 강가에 짓는 것을 당연시했다. 마치 사람처럼 그 모습을 물에 비쳐 본다는 그러한 의미이다. 이곳이 명당이라고 하는 이유는 노이슈반스타인 성의 3면이 각각 '반발트씨에', '알펜지' 그리고 '호프만제' 등 세 개의 호수를 가까이에 두고 있어 성의 모습을 세 곳에서 비쳐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대규모의 성의 설계는 건축가가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놀랍게도 이 성은 루드비히 2세와 뮌헨의 국립극장의 무대작가가 설계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까지 널리 사용되던 보편적인 건축양식을 떠나 전혀 새로운 양식으로 아름답게 디자인되었다. 성 내부의 모든 그림은 뮌헨 미술대의 교수와 학생들에 의해 그려졌다.
성의 건너편 계곡 너머에는 아버지 막시밀리안 2세가 생전에 지은 노란색의 구 백조의 성이 자리잡고 있다. 성 내부에는 그가 죽기 전 까지 지냈던 여러 공간들이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는 오리지날한 형태의 모든 방과 집기들을 볼 수 있다. 접견실에 옥좌가 없는 것으로 보아 옥좌를 놓을 접견실이 완성되기 전에 왕이 사망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왕이 죽은 후 성 안의 미완성된 부분은 더 이상 공사를 진행하지 않았다. 죽은 다음에 완성시키는 것이 의미가 없기 때문이었다.

루드비히왕은 키가 190cm 정도의 큰 왕이었으므로, 침대의 길이는 2미터 10센티이나 되었고, 문마다 손잡이는 보통 사람의 가슴에 닿을 정도로 높이 달려있었다. 콘서트 홀, 또는 가수의 방이라는 커다란 방에는 바그너의 오페라 가운데 '영웅전'의 배경 그림으로 장식하였으며, 1909년 처음으로 이곳에서 연주회를 가지게 된다. 이 성에는 왕의 초상이 어디에도 없는데, 이유는 왕이 자신의 초상이 남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이 콘서트 홀에만 그나마 초상대신 왕가의 문장이 남아있을 정도이다. 이곳에는 또한 성모 마리아의 그림과 조각이 있는 아름다운 예배당이 있어, 그가 생전에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음을 보여준다.
생전에 바그너의 오페라를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성안의 거의 모든 벽화는 바그너의 오페라의 등장인물과 배경으로 장식되었다. 마치 바그너만을 위하여 지어진 성이라는 느낌이 오히려 강하게 들 정도이다. 거실에는 오페라 '파르치팔'과 '로엔그린'의 배경과 등장인물들이 아름다운 회화로 그려져있고 창 쪽의 코너에는 사촌누이로부터 선물 받은 백조 모양의 화병이 놓여 있다. 거실에서 외부로 이어지는 통로는 오페라 '탄호이저'에 나오는 동굴을 인공으로 만들어 놓았을 정도이며, 나머지 방들에도 '트리스탄과 이졸데' '니벨룽겐의 반지'를 비롯한 바그너의 주요 오페라의 회화들로 가득 차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생전에 바그너는 이 노이슈반스타인 성에는 단 한 차례도 와보지 않았다. 루드비히를 만나던 곳은 이 성 건너편의 호숫가에 있는 호엔슈방가우 성으로 루드비히의 아버지 막시말리안 2세에 의해 세워진 노란색의 여름 별궁이다. 이 호수에는 많은 백조가 있어서 루드비히가 백조를 특히 좋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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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의 관광거리 top
뢰머광장 전경
뢰머광장 전경
뢰머광장1
시청사
뢰머광장과 시청사
뢰머 시청사는 뢰머베르크의 북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기원전 50년경 진출한 로마군이 게르만족에 대한 방비를 한 곳이라서 '뢰머베르크 Romerberg' 라고 부르기 시작한 이 지역은 프랑크푸르트에서 옛 건물이 가장 많이 위치하던 성당의 서쪽에 위치한다. 1405년 프랑크푸르트 참의회가 뢰머베르크에 있던 3채의 귀족저택을 사들여 시청사로 개조했는데,그 중 대표적인 '뢰머저택'의 이름을 따서, 시청을 '뢰머'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뢰머는 구시청사의 핵심이며 프랑크푸르트의 역사적인 상징이 되고 있다.

3개의 뾰족한 건물 중에 중앙에 있는 것이 '뢰머'라고 불리우는 구시청 사 건물인데, 이 뢰머 2층의 크고 넓은 홀은 1562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처음으로 황제 대관식이 거행된 이래 황제의 넓은 방이라고 불린다. 신성 로마제국 새황제의 대관식 후에 축하연이 베풀어졌던 황제의 넓은 방인 카이저자르에는 '정의의 분수'가 있고, 남쪽으로는 아침, 점심, 저녁 등 1일 3회 40회의 종이 울리는 니콜라이 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또한, 황제의 방의 벽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52명의 실물 크기의 초상화가 장식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이 시청광장인 뢰머베르크 광장은 프랑크푸르트 구시가지의 중심이며, 최초의 박람회(Messe)가 개최된 곳으로,현재는 마인강 축제,5.1 노동절행사, 각종 문화행사와 대중집회를 개최하는 곳이기도 하다. 광장의 중앙에는 1543년에 건축된 정의의 여신인 '유스티아상'이 오른손에 검, 왼손에는 저울을 들고 서있다. 그리고, 뢰머베르크 광장에 면해 있는 프랑크푸르트 시청(뢰머)은 박람회(Messe)에 참가하는 로마인들의 숙소와 전시장으로 사용된데에서 지금도 시청사를 뢰머(Romer)라고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