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자(韓非子)는 누군가?
한비자(韓非子)는 누군가?
1. 한비자의 意義
한비자는 제자백가(諸子百家;기원전 700~200년에 걸친 춘추전국시대에 활약한 사상가들)중에 법가(法家)를 대표한다. 주나라가 쇠약해지자 지방의 제후들이 일어나 약육강식을 하던 어지러운 세상을 구하려고, 공자와 맹자의 유가(儒家)는 어짐과 의로움(仁義)을, 노자와 장자의 도가(道家)는 자연에 동화를, 묵자(墨子)의 묵가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검소하게 부지런히 일하여,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 잡고 혼란을 막아 잘살수있는 세상을 건설하려고 하였고, 이밖에 명가,음양가,종횡가,농가,잡가등의 학파가 나와 자기들의 주장을 내세웠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상가들은 춘추전국시대의 어지러운 현실을 외면하고 자기들의 이상에 치우처 실현하지 못했다. 다만 한비자로 대표되는 법가의 사상은 현실과 실질적인 문제에 접근하여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한비 이전에 법의 만능을 믿은 한(韓)나라의 신불해(申不害).陳나라의 상앙(商鞅).위(魏)나라 이회(李忄里).齊나라 관중(管仲)등이 엄한 형벌과 술수로서 각기 자기 나라를 부강하게 하였다.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대제국을 건설했던 진나라는 이사와 한비자가 중심으로 법가사상을 실천한대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법가사상이야말로 분열과 상쟁이 계속되온 전국시대를 매듭짖고 천하를 통일하는 데 가장 유효한 사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비의 사상이 이처럼 실질적으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신불해와 상앙의 법술을 아울러 계승하는 한편 다른 학파들의 학설도 현실에 적응 할수 있는 장점이 있으면 주저없이 받아들인 때문이다. 그는 유가에 속하는 순자에게서 禮를 배움으로써 형식과 위엄을 존중할 줄 알게 되었고, 노자에게서 道의 사상을 받아들여 그의 철학적인 바탕을 삼았다. 중국 사상의 이대주류(二大主流)인 유가와 도가 사상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그가 제자백가들의 사상을 집대성하여 현실적으로 활용했음을 뜻한다. 그 밖에도 명가(明家)로부터 형명술(形名術)을, 묵가로부터 이(利)와 용(用)의 방법을, 병가로부터 엄한 군률(軍律)과 술책(術策)을 배웠다.
한편 냉혹하고 엄격한 한비의 사상은 어짐을 주장하는 유가들의 사상과는 극단적인 대립을 보이게 된다. 따라서 한비자를 읽어보면 유가에 대한 통열한 비판을 전편을 통해 느낄 수 있다. 유가사상이 사회윤리의 바탕이 되어 온 중국사회에서 한비는 이 과격한 사상이 용납되기 어려운 일이다. 그리하여 근 천년의 중국역사를 통하여 한비자는 언제나 금서(禁書목)록에 있었다. 그러나 투쟁을 통한 어려운 현실의 극복에 통양사상이 약점을 갖고 있다면 ,한비자가 제자백가들의 사상을 집대성하여 현실적인 성공을 거두웠다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더욱 음미할 가치를 지니고 있다.
2. 한비의 생애
한비는 한나라 제후의 아들 중의 한사람으로 기원전280년 전후에 태어났다. 진천균(陳千鈞)에 의하면회왕이나 환혜왕의 아들일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왕실에 태어나기는 했지만 반벙어리여서 주위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외롭게 자랐다 .귀족사회에 어울리지 못하고 외롭게 살았다는 사실은 그의 성격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의 글속에 느껴지는 울분이나 냉혹한 법가정신은 이러한 주의환경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는 후에 진나라의 재상으로 이름을 떨친 이사와 함께 순자에게서 학문을 닦았다. 순자에게서 유가의 전통사상보다는 禮의 외형적인 규제를 배워 이것을 법치사상으로 발전시켰다. 그가 법을 중시하게 된 대에는 한비보다 약100년 전의 한나라 명재상이였던 신불해의 영향이나 진나라의 상앙같은, 법술로써 정치실력을 올린 사람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유가중 에서도 현실에 대한 인식이 예리 했던 그의 스승 순자는 그로 하여금 현실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직접적이고도 실질적인 방법을 모색하게 하였을 것이다. 그는 말을 잘못하였지만 글을 잘썼다고 한다. 그리하여 한나라가 날로 쇠약해지는 것을 눈으로 보고는 자주 한나라 임금에게 나라를 바로 잡을 방책을 글로 간 하였다. 그러나 그의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여기에 무너져 가는 조국에 대한 우수와 자기의 뜻을 펴지 못하는 울분이 쌓여 고분편(孤憤篇).오두편(五蠹篇)같은 논설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글은 진나라 시황제 손에까지 들어가 그의 멋진 글에 감격했다. 사마천은 사기(史記)노장신한열전(老莊申韓列傳)을 보면 진시황은 고분편과 오두편의 글을 읽고“아아, 나는 이 사람을 만나 함께 놀아본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까지 말했다고 한다.
이 무렵(기원전237년 진시황10년경) 이사는 진시황을 설복시켜 한나라를 정복하게 했다. 이에 진시황은 이사를 시켜 한나라를 공격하니, 한나라는 다급하여 거들떠보지도 않던 한비를 불려내어 진나라로가서 시황제를 달래도록 하였다 .한비는 진나라로가 지금 존한편(存韓篇)에 보이는“한나라를 치는것은 진나라에게 불리하다”.는 내용의 글을 올리고 진시황을 만났다. 진시황을 한비의 학설이 마음에 들어 그를 매우 환대 하였다. 한비에게 행운이 열리는듯 했다. 여기에 한비와 함께 순자에게서 배운 이사는 “한비는 한나라임금의 아들입니다. 지금 임금님께서 천하를 통일하려 하시는데 한비는 결국은 한나라를 위하지 진나라를 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인정 입니다.지금 임금님께서 오랫동안 그를 붙들어 두었다가는 스스로 후환을 남기는 것입니다. 법에따라 처형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고자질 했다. 진시황을 한비를 옥에 가두웠다. 그러자 이사는 사람을 시켜 한비에게 독약을 보내어 자살하게 하였다. 한비는 자기사정을 임금에게 호소하고자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독약을 마시고 말았다 한다. 진시황14년,기원전233년경으로 그의 스승 순자의 죽음과 거의 시기가 같다. 그뒤에 진시황은 그를 용서해주려 했으나 이미 숨을 거둔뒤 였다. 이상은 대략 사기 열전의 기록이다 이보다더 자세한 생애는 알길이 없다. 다만 한비는 진나라로 사신으로 와서 죽을 때까지 상당히 오랫동안 진나라에 멈을렀던것 같다. 그사이 그는 한나라를 위해 진시황을 설복시키려고 임금의 눈치를 보며 무던애를 썼을것으로 본다. 한비는 이 경험을 통하여 유세의 어려움움을 상세히 논한 세난편(說難篇)까지 썼으나 끝내는 유세에 성공하지 못하고 죽고 말았던 것이다.
한비의 사람됨은 냉혹하면서 강직했던 것 같다. 초나라는 오기(吳起)를 등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땅을 빼앗끼고 어지러워졌다(문진편).고 하면서 법술을 지닌 선비를 알아 주지 않은 세상에 대한 울분을 도처에서 토하고 있으면서도 구차히 자기의 목적을 달성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문전편(問田篇)을 보면 당계공(堂谿公)이“초나라는 오기를 등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땅을 빼앗기고 어지러워졌으며,진나라는 상앙을 등용한 덕에 부강해졌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기는 사지를 찢기우고 상앙은 수레에 몸을 매어 찟겨 죽었습니다. 임금을 잘못 만나면 이꼴이 되는데 선생은 어째서 또 위태로운 길을 택하셨습니까?”하는 내용의 질문을 하였을때 한비는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고 있다. “제가 법술을 내세우고 법도를 제정하려는 것은 백성들을 이롭게 하고 사람들을 잘 살게 하는 길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몽매한 임금을 만나게 되고 재난을 당한다하더라도 야비하게 죽음이 두려워 백성들의 이익을 외면하는 짓은 할 수 없습니다.”그리고 또 고분편에 “법을 아는 사람은 반드시 강하고 굳세며 힘 있고 곧다. 힘 있고 곧지 않으면 간악함을 바로잡을 수가 없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자신의 성격을 애기한 듯하다 .어떻든 한비가 죽은지 3년 만에 한나라는 진나라에게 멸망당하고 만다. 한대의 학자 왕충(王充)이 논형(論衡)에서“한나라가 일찍이 공자 한비를 신임했드라면 나라가 기울어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한비가 죽지 않았드라면 진나라도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다.”고 말한것은 예부터 그 한사람의 의견이 아닐 것이다.
3. 전국시대(戰國時代)와 한(韓)나라
전국시대란 춘추시대를 뒤이어 진시황(秦始皇)이 천하를 통일하기까지(기원전402~기원전221)의 약200년간을 말한다 .춘추란 명칭은 공자가 지은 춘추(春秋)라는 역사책에서 따왔고, 전국이란 명칭은 한나라 유향(劉向)이 편찬한 전국책(戰國策)이란 역사책에서 따온 것이다. 주나라 왕실의 실력은 이미 춘추시대부터 쇠약하였지만, 그래도 춘추시대엔 170에 달하는 제후의 나라들이 있었고 또 이들을 이끄는 패자들이 차례로 나타나 주나라왕실을 중심으로 한 천하의 질서를 유지해 갔다. 그러나 전국시대로 들어오면서 그러한 질서는 없어지고 완전히 약육강식의 혼란시대로 들어간다. 오랫동안 대국으로 군림해 오던 중원의 진(晋)나라와 산둥의 제(齊)나라가 그들의 신하들에게 임금자리를 빼앗기고,오랜 전통을 지닌 작은 나라들은 모두 그보다 큰 나라에 먹히여 버린다. 진(晋)나라가 한(韓).조(趙).위(魏)의 세나라로 쪼개어지고 나머지 중국땅은 진(秦).초(楚).연(燕).제(齊)의 네나라가 차지하여 이른바 전국칠웅(戰國七雄)이 나타난다. 이중에서도 진(秦나)라 효공은 죄의 연좌제등을 포함한 상앙의 변법을 채용하여(기원전359년)이들 칠웅중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진나라가 강해지자 상잔속에서나마 묘하게 유지되어오던 세력균형이 무너지기 시작 하였다. 이러한 때에 나타난 것이 종행가(縱橫家)이다. 소진(蘇秦)이란 사람은 진나라를 제외한 여섯나라를 돌아다니며 임금을 설복하여 여섯나라가 힘을 합하여 진나라를 대항하므로써 나라의 명맥을 유지해나가도록 하였다. 그러자 장의(張儀)란 사람은 여섯나라의 연합을 이간질시켜 강한나라와 손을 잡아야 나라를 오래도록 보존해 나갈 수 있다고 설복하였다. 이것이 연횡책(連橫策)이다. 이 장의 외교에 힘입어 진나라는 원교근공책(遠交近攻策)을 써서 여섯 나라를 하나 하나 멸망시켜 마침내 천하를 통일 할 수 있었다. 한비의 조국인 한나라는 이들 전국칠웅중에서도 가장 작고 약한 나라 였다. 나라땅은 사방 천리도 못되고 서쪽엔 진나라,동쪽엔 제나라,북쪽엔 초나라와 접경하고 있었다. 이처럼 작고 약한 나라가 여러 강한 나라들 틈에 끼어 있어서 어려웠다. 진나라가 나머지 여섯 나라를 상대로 싸움을 벌이게 되면 한나라가 가장 먼저 피해를 입었고, 여섯 나라가 연합하여 진나라를 공격하면는 그 선봉에 서야 했다. 한나라 소후(昭侯)때엔 한동안 신불해라는 명재상이 나타나 술법으로 나라를 다스리어 외국이 침범하는 일이 없었던때도 있었다. 그러나 합종책을 따르든 연횡책을 따르든 간에 작고 약한 한나라의 처지는 언제나 어려웠다. 한비 자신이 존한편에서 “한나라가 진나라를 섬긴 지 30여 년이 되었습니다. 나아가서는 곧 방패가 되어주었고 들어와서는 깔개가 되어 왔습니다. 진나라가 특히 정예군대를 내어 다른 나라 땅을 빼앗을 적에는 한나라는 이를 따라 도와서 천하의 원한을 가로맡았고 공은 진나라로 돌아 갔습니다.........한나라는 조그마한 나라인데도 천하에 호응하여 사방을 칠적에는 임금은 욕을 당하고 신하들은 고생을 하여 위 아래가 다 같이 걱정하여 온 지 오래 되었습니다”.하고 진시황에게 말하고 있다. 이러한 어려운 현실을 눈앞에 두고 고심한 나머지 한비는 합종책이나 연횡책이나 모두 나라를 구하는 방법은 되지 못한다(오두편).약한 나라를 구하려면 엄한 법으로 백성을 다스리어 나라의 온 힘을 외곬로 동원함으로써 부강하여 지지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비의 법가 사상은 전국시대의 혼란과 한나라의 어려운 현실을 배경으로 발전한 것이다.
4. 한비의 思想
법치사상의 근원
한비의 법치사상 근원은 그의 스승 순자의 성악설에서부터 더듬어 올라가야 한다. 순자가 성악설의 심리적인 기초로서 사람이란 이기적인 욕망을 내세웠던 것처럼 한비도 사람이란 이기적인 욕심을 지였음을 주장 한다. 순자는 이러한 사람들의 욕망을 예(禮로)써 다스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였는데, 한비는 예로써는 불충분하다, 좀 더 강력한 제재를 가할 수 있는 법(法이) 아니면 안된다고 생각 하였다.굽은 나무도 불로 찐 다음 댈나무로 바로잡을 수 있고 또 바른 나무도 굽히어 수레바퀴를 만들 수 있다.사람의 비뚤어진 성격은 법으로써 바로잡아 다스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의 생각으로는 사람의 행동은 모두가 이기적인 이익이 기본 동기가 되어 있다. 의사가 환자의 더러운 상처를 심지어 빨기까지 하는데 그것은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고 돈을 벌기 위해서다.
수래몰이는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부자가 되어 누구나 수래를 타기 바람는데, 그것도 사실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다. 장의사는 세상 사람들이 빨리 죽어 많은 관이 팔리기를 바란다. 심지어 자식과 부모사이까지도 그렇다. 부모가 어릴 때 자식을 소흘히 키우면 자란 다음 부모를 원망한다. 반대로 자식이 자라서 부모를 봉양하지 않으면 부모들은 화를 낸다. 심지어 아들을 나면 좋아하고 딸을 나면 슬퍼한 나머지 죽여 버리는 일까지 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의 행동이 이기적인 이익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사람의 이기적인 욕망이 이처럼 강한 것이라면 엄한 법으로써 이를 제어(制御)하여 세상을 다스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법을 존중하는 법가사상은 물론 한비에게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제나라의 관중.정나라의 자산.위나라의 이회.초나라의 오기 같은 명정치가들은 모두 엄한 법령으로써 나라의 질서를 유지한 법가의 선구자들이라 볼 수 있다. 그들 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준 사람들은 진나라를 부강하게 한 상앙의 법치주위와 한나라 신불해의 술(術)의 응용과 조나라 신도의 세론(勢論)이라 할 것이다.
상앙은 본시 오기와 같은 위나라 사람인데 사기에 의하면 그는 어려서부터 형명(形名)에 대한 학문을 좋아했다. 형명이란 이 시대 논리학파의 중요한 명제의 하나로 형식과 실지 명목을 부합시킨다는 데 용의점이 있다. 그것은 법가들에게 있어서는 이론의 엄격한 실천문제로 화하여 법치주의와 결합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그에 앞선 오기나 이회의 영향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 그는 위나라로 가서 중사자(中庶子)란 벼슬을 하였으나 이에 만족치 못하고 진나라로 가서 효공을 설복시켜 변법(變法) 시행하였다. 그의 변법이란 백성들의 사사로운 이익의 추구나 개별적인 일체의 행동을 막고 국가의 이익과 실력을 위하는 전체적이고도 엄격하고 철저한 것이였다. 예를 들면 열집 또는 다섯집을 단위로 반을 편성하여 그 한 반에서 일어나는 범죄는 연좌(連坐)로 공동책임을 지도록 하였다. 잘못된짓을 하는것을 알면 이를 고발하고 고발한자는 적의 목을 친 거나 같은 상을 주었다. 죄인을 비호 한자에게는 적에게 항복한 거나 같은 형벌을 내렸다. 공로가 있으면 버슬을 올려주고, 사사로이 싸우는 자는 모두 처벌하였다. 그 밖의 경제정책이나 군사정책에 있어서도 이와 비슷한 엄격하고 철저한 법에 의한 통치를 단행 하였다. 그 결과 진나라는 다른 여섯 나라를 제압할 만한 부강한 나라로 성장한 것이다. 그의 이론은 상자(商子)29편으로 저술되어 세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한비자에서도“나라 안 사람들은 모두 정치를 애기하며 집집마다 관중과 상앙의 법서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한비가 이 상앙의 법치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음은 무시할 여지가 없다 .신불해는 한비보다 약 100년 전 한나라를 통치한 상앙과 같은 시대의 명재상이다. 사기에 신불해의 학문은 황제와 노자에 근본을 두고 있고 형명을 위주로 하고 있다(노장신한열전(老莊列傳).고 하였다.이것의 형명이 바로 술(術이)다. 형식(形)과 명목(名)을 부합시킨다는 형명학은 신불해에 이르러는 신하들의 이론과 비판을 그들의 행동과 일치시키는 기술로 발전하였다. 신하들이 한 말을 검토하고 추궁함으로써 신하들을 제어하여 임금자리를 안정 시킨다는 것이다. 그 밖에 그의 술에는 임금의 감정인 뜻을 여러 신하들에게 보여 줘서는 안되며 또 신하들에 대하여는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등 여러 가지 기술적인 문제가 포함 된다. 다시 말해서 신불해의 술이란 신하들을 조종함으로써 임금의 자리를 확보한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한비는 상앙의 법치에다 신불해의 술을 보태어 한층 더 완벽한 법가사상을 이룩하였다. 그 자신이 “상앙의 뛰어난 방법으로 진나라는 부강해졌다. 다만 신하들의 간사한 짓을 분별할 술책이 없으면 그러한 나라의 부강도 신하들의 이익이 되고 말 따름이다.”(정법편)고 말한 것은 바로 그 사실을 입증 하는 것이다. 신하가 임금을 죽이고 아랫사람이 웃사람을 치기 예사였던 전국시대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필요한게 술 이였는지 모른다. 신불해의 저술로는 申子 두편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어떻든 신불해의 신하를 부리는 술책이 한비의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음엔 틀림 없다.
신도는 조나라 사람이지만 제나라에 오래 머물었으며, 맹자와 거의 같은 시대의 사람이다. 그는 권세란 말로 표현할 수도 있는 세(勢)를 중시 하였는데 한비자 난세편(難勢篇)에서 그의 이론을 적극 옹호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군주의 권세에 대한 한비의 사상은 신도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 것이다. 신도는 “나는 용은 구름을 타고 등뱀은 안개 속을 노니는데, 구름 거치고 안개 개이면 용이나 등뱀은 지렁이나 개미와 같이 된다.......요 임금도 보통인 남자였다면 세 사람도 다스리지 못했을 것이며, 걸 왕도 천자가 되어서는 천하를 어지럽힐 수가 있었다. 나는 이로써 권세와 지위가 중요한 것이지 현명하고 지혜 있는 것 같은 것은 믿을 것이 못됨을 안다”.(난세편)고 주장 하였다. 따라서 정치를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권세를 누가 어떻게 잡고 또 어떻게 하면 오래도록 지탱하느냐 하는 것이지, 현명한 사람이나 지혜 있는 사람을 찾고 있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한비는 신도의 이러한 세의 사상을 받아들여 그것을 순전한 인위적인 것으로 규정하고는 그것을 자기 법사상 체계의 중심에 올려놓았다. 상앙의 법에 있어서는 그 법의 권리의 근원이 명확하지를 않다. 신도는 임금의 권세에서 보편적인 통치의 원리를 찾고 있는데, 이러한 그의 사상은 바로 상앙의 부족을 보충해 줄 수 있는 것이였다.
한비의 법사상
중국 학술사상 신불해나 신도도 보통 이회와 상앙과 함께 전기의 법가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신불해의 술이나 신도의 세는 그 자체로서는 절대로 법가사상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들이다. 한비의 계승을 거처서 비로서 그들의 술(術)과 세(勢)가 한비의 사상체계에 끼어들면서 법가사상의 체계속에 살아 날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한비자는 법가사상의 집대성자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비의 법사상이란 도다체 어떤 것인가? 먼저 한비자를 보면 그는 법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법이란 것은 글로 써서 문서화되어 관청에 비치되고 또 백성들에게 공포된 것이다......그러므로 법은 분명하여야만 한다.....그래서 명철한 임금이 법을 공포하면 곧 나라 안의 귀하고 천한 모든 사람들이 이를 듣고 알아야 한다”.(난삼편) 따라서 이 법은 바로 나라를 다스리는 데 기본이 되는 것이다.
“명철한 임금은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법의 밖으로 뜻을 두지 않게 하고 법의 안에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며, 모든 행동이 법에 벗어나지 않게 한다”.(유도편) 이것은 임금의 권세를 정점으로 하여 제정된 법이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의 행동의 기준이 됨을 뜻한다. 한비는 이러한 법을 기준으로 하여 나라를 다스리자면 법의 근원이 되는 임금의 권세도 잘 보전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 하였다. 그 결과 신불해의 술을 이에 보태어 그는 법술이란 말을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으로서 즐겨 쓰게 되었다. 정치에 관한 모든 일의 기준이 되는 법을 정해 놓고 이를 잘 실천하기 위하여 임금은 술로서 신하들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 첫단계로서 앞에서도 “모든 행동이 법에 벗어나자 않게 한다”고 하였거니와 일체의 개인적인 동기나 행동은 엄격히 배제된다. 한비자를 보면 “법령을 확립하는 것은 사사로움을 폐하기 위한 것이다. 법령이 시행되면 사사로운 방법은 폐지된다. 사사로움이란 법을 어지럽히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언에 말하기를 “다스리는 원인이 되는 것은 법이고,혼란의 원인이 되는 것은 사사로움이다. 법이 서면 사사로운 짓을 할수 없게 된다”.하였다. 그래서 사사로운 방법을 쓰는 자는 어지러워지고 법을 따르는 자는 다스려진다고 한 것이다. 이처럼 개인적인 행동을 완전히 막는 절대적인 기준으로서의 법을 확정시킨 뒤에는 여기에 신불해에게서 빌어온 술을 보탠다. 법과 술의 관계를 잘 설명해 주는 글로 한비자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신불해와 상앙 두 사람의 이론은 어느것이 나라에 더 절실합니까?” 한비가 대답했다.“그것은 재어볼 수가 없소. 사람은 열흘만 굶어도 죽게 되고, 추위가 한창일때 옷을 입지 않으면 역시 죽소. 이때 웃과 음식 어느것이 사람에게 더 절실한 것이라고 애기 할 수 있겠소? 곧 한가지가 없어도 않되는 것이니 모두 삶을 보양하는 물건이기 때문이오. 지금 신불해의 술과 상앙의 법도.....한가지가 없어도 안되는 것이니 모두 제왕의 기구이기 때문이오”.. 다만 술만 알고 법을 모른다면 ....관청에 법이 잘 지커지지 않을 것이다.....다만 법만 알고 술을 모른다면...임금은 간악함을 알아 낼 재간이 없을 것이다(정법편). 그러면 구체적으로 술이란 무엇인가? 한비가 내린 정의는 다음과 같다. “술이란 임무를 따라 벼슬을 주고 명목을 따라 내용을 따지며, 죽이고 살리는 실권을 다루고 여러 신하들의 능력을 시험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임금이 쥐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정법편) “술이란 가슴속에 감춰 두었다가 여러 가지 일의 발단에 대처함으로써 남몰래 여러 신하들을 제어하는 것이다.”(난삼편) 술이란 바로 신하들을 다루는 술책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한비자”를 보면 임금은 신하에게 본 마음을 내보여서는 안된다는 “무위술(無爲術)” 또 신하의 이론과 행동이 부합되는가 따저야 한다는“형명술(形名術)”남의 말만 듣지 말고 사실을 잘 검토해야 한다는“참오술(參伍術)”신하들이나 남의 말을 듣는 방법을 논한“청언술(聽言術)”사람을 등용하는 방법을 논한“용인술(用人術)”등의 술에 관한 이론이 허다하게 보인다.
이러한 술을 알고 있으면 다음엔 절대적인 법의 권위로 모든 사람을 귀일케만 하면 나라는 저절로 부강해진다고 믿었다. 한비가 “법을 다스리는 지극히 명철한 사람은 모든 것을 법에 맡기지 사람에게 맡기지 않는다.”(제분편)고 한 말은 사람 위에 법이 군림하고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법은 현명한 신하보다도 더 중요하다. “법도를 버리고 현명한 사람을 높이면 곧 어지러워지고, 법을 버리고 지혜 있는 사람을 임용하면 위태로워진다. 그러므로 법을 높이되 현명한 사람은 존중하지 않는다고 하였다”.(충효편) 따라서 “법술을 버리고 자기 마음으로 다스리러 한다면 요임금 같은 이라도 한 지방을 바로잡지 못할 것이다.”(용인편)고 생각 하였고, 법을 가볍게 여기는 지혜 있는 자나 능력 있는 자는 오히려 위험한 존재라고 생각하였다. “성인의 도는 지혜와 기교를 버리는 것이다. 지혜와 기교를 버리지 않으면 법도를 지키기 어려워진다.”(양최편) “법을 따르면 절대로 안전 하지만 지혜와 능력을 믿으면 실폐가 많다.”(식사편)
한비의 법술은 이처럼 완전히 객관적인 것이 여서 거기엔 또 다른 어떤 작위(作爲)가 가해질 필요가 없다. 그저 모든 일을 법에 따라 처리하고 법에 따라 해결하면 그뿐이라는 것이다. 다시 한비의 법사상을 요약하면 첫째는 통치의 권력은 절대적으로 임금에게 속하여야 한다는 바탕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물론 신도의 勢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다. 둘째는 모든 정치행동과 백성들의 행동의 기준이 되는 엄격하고 냉혹한 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앙의 법가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다. 셋째는 임금은 이 법의 시행을 관리하는 신하들을 제어할 수 있는 術을 지녀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신불해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다. 이 세가지 요건이 갖추어지려면 어떠한 개인적인 동기나 개인의 현명함 또는 지혜 같은 것을 개입시킬 것 없이, 객관적으로 엄정하게 법을 밀고 나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중형론(重刑論)
엄격한 법의 실천에 자연히 뒤따르게 되는 것은 무거운 형벌이다. 형벌이 무거워야만 백성들은 법을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자락의 무명이 아무도 보지 않는 길거리에 떠어져 있다면 이를본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주어 갈 것이다. 그러나 뜨거운 불 속이나 모든 사람이 보는 시장 한복판에 백냥의 돈을 놓아두면 비록 도척 같은 유명한 도적이라도 이를 집어가지 못 한다. 그러니 사람이란 법을 어겨도 그 형벌이 대수롭지 않으면 쉽사리 죄를 지게 되고, 형벌이 엄하면 그 이익이 크다 하더라도 감히 죄를 짓지 못 한다. 그러므로 법으로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불처럼 뜨겁고 만인이 볼 수 있도록 공정한 형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법을 잘 지키는 사람에게는 상도 주어야 한다. “상은 법을 삼가는 사람에게 주고 벌은 법령을 어기는 자에게 가한다.”(정법편) 고 한비 자신이 말하고 있고 또 상과 벌을 흔히 아울러 얘기하고 있지만 상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벌이다. 그는 “그의 법령과 금령을 밝히고 그의 상과 벌은 반드시 준다......이것은 절대로 망하지 않는 술책인 것이다.”(오두편)“지극히 잘 다스러지는 나라에는 상과 벌만이 있지 기쁨과 노여움은 없다.”(용인편)그리고 나라를 편히 하는 일곱 가지 술책중에서도 “상과 벌이 옳고 그름에 따라 주어져야 한다.”고 상별을 첫째롤 꼽고 있다(안위편). 그런데 이 상과 벌은 공정해야 한다. 그는 “상을 너무 주는 나라는 백성을 잃고, 형벌을 너무 가하는 나라는 백성들이 두려워하지 않는다. 상을 주어도 백성들을 독려하기에 부족하고 형벌을 가하여도 죄를 금하기에 부족하다면 비록 나라가 크다 하더라도 반드시 위태로워질 것이다”.(식사편)고 한말은 상벌이 적절히 주어져야만 한다는 뜻일 것이다. 이러한 상이나 벌은 자기 자신의 공로나 범죄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상은 반드시 주어져서 신용이 있어야 하고 죄에는 반드시 형벌이 가해져야만 한다. 따라서 형벌에는 절대로 용서가 있어서는 안되며 친하고 가까운 사람이나 대신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똑 같이 주어져야 한다. 죽음은 용서(容恕)없고 형벌은 용사(容赦)가 없어야 한다. 죽음을 용서하고 형벌을 용사하는 것을 위세를 함부로 쓴다고 말하는 것인데 국가가 위태로워질 것이다.(외저설좌하편) “진실로 공이 있으면 비록 멀고 천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상을 주어야 하며, 진실로 잘못이 있다면 비록 가까운 사랑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주도편) “잘못을 처벌함에 있어서는 대신도 피하지 못하고, 잘한 것을 상줌에 있어서는 보통 사람도 빠뜨리지 않는다.”(유도편) 이것은 모두 개인감정을 떠난 객관적이고도 엄정한 상벌의 시행을 주장한 말이다. 그러면서 “형벌이 성하면 백성이 안정되고, 시상이 번거로우면 간악함이 생겨난다.”(심도편)고 하면서 후한 상을 주는 것 보다는 무거운 형벌을 주는 편이 더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이 형벌은 백성들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악 한 자를 처벌하는 것이므로 악한자들을 없애어 백성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지만 유가들이 주장하는 어짐(仁)의 세계에서 보면 그것은 가혹한 것임에 틀림없다. 논어를 보면 양을 도적질한 아버지를 고발한 아들에 대하여 공자는 다음과 같이 비난하고 있다. “아비는 자식을 위하여 숨기고 자식은 아비를 위하여 숨겨 준다. 그 숨겨 주는 데에 의로움이 있다.” 그러나 한비는 국가의 이익을 위하여 제정된 법은 어떠한 개인의 감정에 의하여서도 금해질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러한 공자의 태도를 비판 한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라 하더라도 서로 죄를 숨겨 주다 보면 나라의 법이 무너진다. 법의 시행에는 부자간의 사랑이나 동정 같은 것도 개입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비의 법의 실증주의(實證主義)는 법률사상으로써 커다란 진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歷史哲學
이러한 한비의 법사상의 밑바닥에는 또 한가지 그의 적극적인 역사철학이 있다. 중국 역사는 황제의 개국으로부터 시작하여 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이미 2000년여의 역사가 있었다. 이 시대의 사상가들은 모두 춘추전국 시대의 현실에 대하여 불만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역사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 큰 파벌로 갈라졌다. 하나는 역사에 대하여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견해를 가진 일파이다. 그들은 중국역사는 점점 퇴화하여 살기 어려운 세상으로 변해갔다. 따라서 이 세상을 평화로운 세계로 만들기 위하여 는 옛날의 정치를 본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복고주의는 유가가 대표한다. 반대로 하나는 역사를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면에서 파악하는 일파이다. 이들은 역사란 진화하는 것이므로 그 시대는 모두 그 시대에 특징이 있다. 세상을 잘 다스리기 위하여는 그 시대에 알맞은 새로운 방법을 창안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보주의는 법가가 대표한다. 따라서 유가에서는 “요.순을 본뜨고 문왕과 무왕의 다스림을 밝힌다.”는 깃발을 내세웠고, 법가들은 “세상의 일들을 따져서 그에 따라 적절히 대비 한다.”는 구호를 내세웠다. 한비자 오두편을 보면 이러한 역사의 진화관념을 첫머리에 논하고 있다. 상고시대에는 사람이 사는 집을 처음 만든 사람이 유소씨(有巢氏)라 하여 천자가 되기도 하고, 불의 이용을 처음 가르친 사람이 수인씨(燧人氏)라 하여 천자가 되기도 하였다. 중고시대에는 도랑을 파서 홍수를 다스려 임금이 된 우(禹)임금이 있다. 근고시대엔 임금이 포악하다 하여 이들을 죽이고 자기가 대신 임금이 된 탕(湯)임금과 무왕(武王)이 있다. 그런데 만약 상고시대의 일을 중고시대 하거나, 중고시대의 일을 근고시대에 하거나, 근고시대의 일을 현대에 하려 든다면 모두 비웃음거리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옛날 일을 본받으려는 사람들은 모두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세상 일을 따져서 거기에 따라 적절한 대비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가들이 성인이라 주장하는 요.순이나 탕임금.무왕에 대하여도 한비는 견해를 달리 하였다. 요임금은 어진 순임금에게 임금자리를 물려 주고 순임금은 우(禹)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준 이른바 선양(禪讓)을 유가들은 대단하게 애기하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라 한다. 그때는 궁전이라야 초라한 초가집이 였고 먹는 것도 입는 것도 모두 시원치 않았다. 그런 임금 자리란 지금의 한 고을 수령보다 훨신 못한 자리라는 것이다. 아무런 이익 없는 자리를 물려 준게 무엇이 대단하냐는 거다. 따라서 그는 성인의 필요성까지도 부정한다. 요.순 같은 성인은 천세에 한 사람 정도 나오고, 걸.주 같은 폭군도 천세에 한 사람 정도 나온다. 반드시 성인이 나와야만 나라가 다스려진다면 결국은 천세에 한 번 다스려질 정도에 그치게 될것이다. 폭군이 나와서 세상이 어려워진다 해도 그것은 천세에 한번 어려워지는 것이 된다. 그러니 성인도 믿고 있을게 못되지만 폭군도 너무 두려워할게 없다. 언제나 그 시대의 사정을 살펴서 그 시대에 알맞은 대책을 세우기만 하면 된다. 이런 관점에서 한비는 어지러운 전국시대의 사정을 세밀이 관찰하고 연구하였다. 그 결과 생겨난 것이 그의 법가사상 이였던 것이다. 따라서 한비의 사상은 제자백가중 어느 사상가보다도 현실적이고 적극적이라 할 수 있다. 한비의 법가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진시황(秦始皇)이 다른 여섯 나라를 누르고 천하를 통일했던 것은 우연한 일이라 할 수 없다.
5. 韓非 의 著書
한비의 저서인 “한비자(韓非子)”는 본시“韓子”라 불렸었다. 송나라 이후로 학자들이 당대의 학자 한유(韓愈)를 “한자”라 흔히 부르게 되면서 혼동될 염려가 있으므로 한비의 책을“韓非子”라 바꿔 부르게 된 것이다. 한비자의 저서는 한비 생전에도 이미 퍽 널리 읽혀진듯하다. 史記에 의하면 진시황은 한비의 글 孤憤篇(고분편)과 오두편(五蠹篇)을 읽고“아아 내 이사람을 만나 함께 놀 수만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노라!”고까지 탄식 했다 한다. 한비가 죽은 뒤엔 진나라의 재상 李斯와 진이세(秦二世)도 자주 韓非子를 그들의 글에 인용하였다.(史記 李斯傳및 秦本紀) 司馬遷(사마천)은 사기에 한비의 傳을 쓰면서 특히 世難篇(세난편)을 수록하고 “한비는 과거 정치의 得失과 變化를 살피어 孤憤(고분).오두(五蠹).內外儲(내외저).說林.世難등 十餘萬言(십여만언)을 썼다.”고 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지금 우리가 보는 韓非子속에 들어 있다. 그러나 사마천은 그때의 한비자가 전부 몇편 이였는지 말하지 않고 있다.
漢나라 劉向에 이르러 한비자는 비로서 오십오편으로 교정되어 別錄에 실리었다. 유향의 아들 劉歆(유흠)은 그의 아버지의 뜻을 이어 집약(輯略)을 지었는데, 거기에 “한자”는 제자략(諸子略)法家類(법가류)속에 들어 있다. 그러고 班固의 漢書 藝文志에도 “한자”오십오편이 있다고 기록 되어 있다. 그런데 六朝時代의 기록부터 시작하여 隋書(수서) 경적지(經籍志).唐書경적지.신당서 예문지.宋史예문지 등에는 모두“韓子”이십권이 있다고만 기록 되어 있다. 명사(明史)엔 기록이 없고 淸대의 四庫全書總目(사고전서총목)에도 법가류에 韓子(한자) 이십권이 있다. 그런데 漢대의 기록의 오십오편과 그 이후 이십권은 내용이 완전히 같은 것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다.
지금 전하여지는 가장 오래되는 韓非子판본은 송건도본(宋乾道本)인데, 元대에 발견된 판본은 오십삼편이였다 한다. 명대 능영초(凌瀛初)의 한비자범례를 보면 간겁(姦劫)한편과 설림의 하편이 없어진 것이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여전히 오십오편이 전하여지고 있으니 그 일부가 남아 전하여지는 것인 듯 하다. 그 밖에도 옛 책에 인용되는 한비자의 문장 중에는 현재 우리가 보는 한비자 가운데에 들어 있지 않은 글들이 꽤 있어 부분적으로 없어진 분량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지금 우리가 보는 한비자는 한나라시대의 한자 55편보다 내용이 훨신 줄어든 책이다. 그러면 또 이것들은 모두가 한비의 글이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근인 고형(高亨)의 한비자보전(韓非子補箋)서문에 보면 한비자중의 초현진(初見秦).존한(存韓).難言(난언).愛臣.유도(有度).飾邪(식사)의 여섯 편은 모두 한비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후세의 한비자를 편집하는 사람이 집어넣은 것이라 하며 그 증거를 상세히 논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도 한비자중에는 한비가 직접 쓰지 않은 그의 제자 같은 법가에 속하는 학자들의 글이 끼어 있음을 알 수 있다.
韓非子의 현존 판본으로는 송건도본(宋乾道本)이 가장 오래된 것이며, 그 밖에 명대의 道藏本(도장본).조본(趙本).진본(陳本)등의 휼륭한 “韓子”판본이 있다. 그리고 註解書로는 청대 왕선신(王先愼)의 韓非子集解가 여러 학자들의 설을 모아 절충해 놓은것 이여서 읽기에 가장 편리하다. 그 밖에도 오여륜(吳汝綸).유사배(劉師培).고형(高亨).왕숙민(王叔岷).용우순(龍宇純)등의 근세 또는 현존 학자들이 빛나는 업적을 남기고 있으며, 대만의 중화총서위원회(中華叢書委員會)에서 발간한 진계천(陳啓天)의 한비자교석(韓非子校釋)은 주해가 상세하고 풍부한 자료가 실려 있어 韓非子를 읽는 데 편의를 주는 책이다.
6. 韓非子의 現代的 義意
한비의 사상은 최근에 이르러 그의 객관적이고 實證적인 사고방식이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 점은 특히 동양사상의 일반적인 약점이 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한비의 非情的인 人間觀에 따른 全體主義는 크게 문제가 되겠지만, 그의 現實主義에 바탕을 둔 과학적인 사고방식은 충분히 존중할 만한 값어치가 있을 것이다. 아직도 韓非子는 역사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연구하여야만 할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다. 우리는 이런점을 주의 하면서 韓非子를 읽어야 할 것이다.
韓非子第十九卷오두편(五蠹篇)에 있는 글을 일부 소개 한다. 두는 나무를 파먹는 좀벌레, 나라에도 좀벌레처럼 나라를 파먹는 좀 벌레가 다섯 종류나 있다는 것이다. 이 다섯 종류의 좀벌레를 논한다는 뜻에서 “오두”라는 편명을 붙였다. 이 편은 세난편(說難篇)과 뒤의 현학편(顯學篇)과 함께 옛부터 韓非子를 대표해온 유명한 편이다.
12절 “그러므로 어지러운 나라의 습속으로서, 학자들은 옛 임금들의 도를 주장하면서 어짐과 의로움을 근거로 삼고 용모와 옷을 차려 입고서 변설로 꾸며대어 현대의 법을 의심스럽게 만들며 임금의 마음을 두 갈래로 만든다. 또 논설가들은 거짓 주장을 늘어 놓고 외국의 힘을 빌어 그의 사사로운 이익을 얻고 국가의 이익은 버린다. 칼차고 다니는 俠客(협객)들은 부하들을 모으고 義理를 내세움으로써 그의 명성을 드러내며 관청의 禁令을 범한다.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자들은 개인 집에 재물을 쌓고 뇌물을 받아 먹으면서 권력자들의 청탁은 들어주고 땀흘리는 말처럼 수고하는 사람들은 물리친다. 상업과 공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은 이즈러진 그릇 같은 것을 만들고 팔고 하여 옳지 못한 재물을 모으고 매물을 쌓아놓고 때에 따라 투자하여 농부들의 이익을 빼앗는다.
이상 다섯 가지는 나라의 좀벌레인 것이다. 임금들이 이 다섯 가지 좀벌레 같은 백성들을 제거하지 않고 곧고 바른 선비들을 기르지 않으면 비록 세상에 멸망하는 나라가 있고 파멸하는 왕조가 있다 하더라도 또 한 이상할 게 없는 것이다.
*시대의 변천에 따른 정치 방법의 변화로부터 유도하여 온 결론이 이 나라를 좀목는 인간들을 없애라는 것이다. 다섯가지를 요약 하면, 첫째,옛임금의 도와 어짐과 의로움을 내세우는 학자. 둘째,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변설가. 셋째, 멋대로 날뛰는 협객. 넷째, 임금을 그르치는 측근자들. 다섯째, 비양심적인 상인과 공인. 이것을 요즘에 대비 하며 음미하면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