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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중심인 마르크트 광장에 있다. 14세기 고딕 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이 절충된 매력적인 건물이다. 높이 60m의 시청사 탑에 오르면 도시와 타우버 계곡의 전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시청사 내부의 관광 안내소는 평일 오전9시- 정오12시까지, 오후2시-오후 6시까지 문을 연다. 토요일에 는 오전 10시부터, 일요일에도 여름에는 오전10시부터 정오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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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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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르츠부르크의 관광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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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이 뒤섞여 있는 성이다. 즉,17세기초에 내부가 르네상스 양식으로 개조되었다가 30년전쟁 때(1618-48) 바로크 양식으로 다시 바뀌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이 성은 원래 켈트족의 요새 및 1201년부터 1791년까지 대주교의 거성이었는 데,이곳의 테라스에서는 마인강과 건너편 시가지를 바라볼 수 있다. 뷔르츠부르크의 전경을 한 눈에 바라다 볼 수 있는 데,그 모습이 무척 아름답다. 또한,이 내부에는 바로크 양식의 무기고를 개조한 마인 프랑켄 박물관도 있다. 이 박물관에는 프랑켄 지방의 미술품 외에도,독일이 낳은 뷔르츠부르크 출신의 천재 조각가인 틸만 리멘슈나이더 작품 '아담과 이브'가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마리안베르크의 식민지는 이미 후기 청동기 시대 때부터 생겨났다. 초기 철기 시대의 중유럽 문화의 시대에는 이곳에서,450년부터 550년까지 캘트족 선제후의 거성으로 쓰였고,또 그리이스의 도자기를 수입하는 거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비로소 704년 경,이 요새는 스코틀랜드의 선교사인 Kilian과의 교섭을 시작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문서에 기록되게 되었다. Konrad von Querfurt(1198-1202) 주교하에 최초로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거 왕조가 세워 졌고,그 후 Herrmann von Lobdeburg (1225- 1254)주교가 집권시에 이 왕조는 끝이 났다. 그래도,그들의 집권시에 Querfurt는 성의 제일 높은 망루를 만들어 세웠으며,Lobdeburg는 두 개의 하늘을 찌를듯한 성의 본관을 덧붙여 만들었다. 이것이 오늘날의 선제후성의 옛부분이다. 뷔르츠부르크에 온 모든 방문객들은 바로 이 마리엔부르크 요새를 꼭 들려 보아야만 한다. 다시 말해,뷔르츠부르크 시의 여행은 마리엔베르크성의 여정 없이는 완성되었다고 할 수 없다. 거닐다 보면 이 곳에는 2개의 박물관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선제후 박물관'과 '마인 프랑키쉐 박물관'이 그것이다. 기원전 1000년 경에는 처음으로 켈트족에 의해 요새의 일부가 만들어 지기 시작했고,AD 706년에는 동정녀 마리아에게 교회를 새로이 지어 헌당하였으며,그와 동시에 목조로 성벽을 쌓아 요새를 만들어 나갔다. 13세기에는 후작 주교의 궁정을 이곳의 요새로 옮기게 되었다. 이것이 최초로 만들어진 요새화된 중세의 성의 기원이다. 1308년에는 Randersacker탑이 처음으로 세워지기도 하였으며,1573년에는 선제후의 저택이 도서관과 겨울을 나기 위한 숙소 등을 건축함으로써,더욱 확장 되기에 이르렀고,장크트 마리아의 탑,그리고 성곽 둘레의 해자등의 시설이 새로이 추가적으로 만들어 졌다. 그러던 중,1613년,스웨덴의 국왕인 Gustav Adolf가 30년 전쟁을 일으켜 이 요새를 공격하였고,1720년에는 선제후의 거성이 도시내의 레지덴츠로 옮겨 가게 되었다. 현재는 이 요새가 완전히 군사적인 목적으로만 쓰이고 있다. 1814년,이 성은 바바리아 왕국으로 이전되었으나,1945년 3월 16일,전쟁중에 공습으로 인해 이 요새의 대부분은 파괴되기에 이르렀다. 그 후,종전 후인 1950년부터 이 요새는 재건되기 시작했고,거의가 회복되어 오늘날의 모습으로 까지 되찾게 된 것이다.
* 가는방법 : 이곳에 가기 위한 방법에는 2가지가 있다. 버스를 이용하여 가거나,아니면 모험심 있는 사람이라면,포도원으로 뒤덮여 있는 Marienberg나 St. Mary언덕의 꼭대기 숲을 걸어 올라가는 것이다. 버스를 타고 갈 경우에는,'Spitale'정류소에서 9번 버스를 타면 되는 데,약 30분간 소요된다. 요금은 일반이 DM 2로서 싼 편이다. 이 버스 승강장은 'Alte Mainbrucke'의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걷고자 할 때에는 언덕의 밑에서부터 숲까지 약 30분 가량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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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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퓌센의 관광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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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년에 착공하여 1896년에 완공된 성으로서, 디즈니가 디즈니랜드를 건축할 때 모델로 삼았으며, 바이에른의 국왕인 루드비히 2세에 의해서 건축된 곳인데 일명 '신(新)백조의 성'이라고도 불리운다. 오늘도 전 세계로부터 방문객들의 발걸음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이 아름다운 성은, 외벽이 흰 색과 베이지 색의 대리석을 사용해 중세의 중후한 멋을 풍기면서도 무겁게 가라앉지 않고 밝은 색조를 띄고 있다. 날씬하며 우아한 자태로 건축된 이 성의 지붕 위에는 비 대칭적인 여러 개의 푸른 원추들이 예술성을 더하고 있다. 유럽풍 바탕에 아랍의 특이한 문양을 가미한 듯 한, 그야말로 동화 속에서나 꿈꿀 법한 신비한 모습이다.
이 성을 지은 사람은 루드비히 2세인데,그는 당시 독일 남부의 바이에른 왕으로서,1845년 8월 25일에 아버지 막시밀리안 2세와 어머니 마리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감수성이 예민하고 특히 성장하면서 시와 음악,그리고 미술과 같은 예술 분야에 심취하였고 일찍이 건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나중에 이 성을 자신이 직접 설계하게 된 계기가 된다. 1861년 2월 2일 루드비히 2세가 16세 되던 해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관람한 뒤 부터 바그너의 열성적인 팬이 되고 일생의 변화를 겪게 된다. 1864년 타계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약관 18세에 왕위에 오르지만 과거 절대군주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자유화와 자본주의 시대가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새로운 시대가 되어 고전한다. 상황은 예전 같지 않게 되었고 더군다나 그는 정치보다는 예술 세계를 좋아하는 감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궁전이 있는 뮌헨을 가급적이면 피해 남부 지방의 알프스 부근의 전원에 있을 때 더욱 행복감을 느꼈다고 한다. 1870년이 되자 유럽의 정치적인 상황이 러시아와 프랑스간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충돌에 휘말리게 된다. 특히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로 그는 더욱 더 성을 짓는 일에 몰두하고, 반대로 정치에는 흥미와 자신감을 잃게 된다.
그러나, 루드비히 2세는 41세의 젊은 나이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만다. 침실에서 자던 어느 날 새벽 왕은 정적에게 납치당하여 슈탄베르크 호수의 요양소에 강제로 연금을 당하게 된다. 1886년 요양소에 갇힌지 사흘만에 변사체로 발견되었는데, 왕의 죽음은 두 가지로 추정되고 있다. 첫째는 왕의 무능을 보다 못한 정적에 의해 살해되었을 가능성, 두번째는 강제 연금된 자신을 비관해 자살을 시도하였다는 것이라는 추측이지만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그는 살아 생전 성을 세 곳에 지었지만, 그나마 완성된 곳은 신 백조의 성 하나뿐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성 역시 1869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17년 동안 지었음에도 3분의 2밖에는 완성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루드비히가 왕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재산을 모두 털어 지었을뿐만 아니라 때로는 은행 융자를 받거나 돈이 생길때 마다 지었기 때문이다. 해서 루드비히가 죽을 무렵, 성 건축에 따른 빚은 무려 1천 4백만 마르크에 이르렀다. 그렇게 정성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루드비히 2세가 이 성에 살았던 것은 겨우 6개월 정도였다.
이 성은 산 중턱의 명당자리에 자리잡고 있다. 예로부터 규모가 큰 건축물은 호숫가나 강가에 짓는 것을 당연시했다. 마치 사람처럼 그 모습을 물에 비쳐 본다는 그러한 의미이다. 이곳이 명당이라고 하는 이유는 노이슈반스타인 성의 3면이 각각 '반발트씨에', '알펜지' 그리고 '호프만제' 등 세 개의 호수를 가까이에 두고 있어 성의 모습을 세 곳에서 비쳐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대규모의 성의 설계는 건축가가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놀랍게도 이 성은 루드비히 2세와 뮌헨의 국립극장의 무대작가가 설계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까지 널리 사용되던 보편적인 건축양식을 떠나 전혀 새로운 양식으로 아름답게 디자인되었다. 성 내부의 모든 그림은 뮌헨 미술대의 교수와 학생들에 의해 그려졌다. 성의 건너편 계곡 너머에는 아버지 막시밀리안 2세가 생전에 지은 노란색의 구 백조의 성이 자리잡고 있다. 성 내부에는 그가 죽기 전 까지 지냈던 여러 공간들이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는 오리지날한 형태의 모든 방과 집기들을 볼 수 있다. 접견실에 옥좌가 없는 것으로 보아 옥좌를 놓을 접견실이 완성되기 전에 왕이 사망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왕이 죽은 후 성 안의 미완성된 부분은 더 이상 공사를 진행하지 않았다. 죽은 다음에 완성시키는 것이 의미가 없기 때문이었다.
루드비히왕은 키가 190cm 정도의 큰 왕이었으므로, 침대의 길이는 2미터 10센티이나 되었고, 문마다 손잡이는 보통 사람의 가슴에 닿을 정도로 높이 달려있었다. 콘서트 홀, 또는 가수의 방이라는 커다란 방에는 바그너의 오페라 가운데 '영웅전'의 배경 그림으로 장식하였으며, 1909년 처음으로 이곳에서 연주회를 가지게 된다. 이 성에는 왕의 초상이 어디에도 없는데, 이유는 왕이 자신의 초상이 남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이 콘서트 홀에만 그나마 초상대신 왕가의 문장이 남아있을 정도이다. 이곳에는 또한 성모 마리아의 그림과 조각이 있는 아름다운 예배당이 있어, 그가 생전에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음을 보여준다. 생전에 바그너의 오페라를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성안의 거의 모든 벽화는 바그너의 오페라의 등장인물과 배경으로 장식되었다. 마치 바그너만을 위하여 지어진 성이라는 느낌이 오히려 강하게 들 정도이다. 거실에는 오페라 '파르치팔'과 '로엔그린'의 배경과 등장인물들이 아름다운 회화로 그려져있고 창 쪽의 코너에는 사촌누이로부터 선물 받은 백조 모양의 화병이 놓여 있다. 거실에서 외부로 이어지는 통로는 오페라 '탄호이저'에 나오는 동굴을 인공으로 만들어 놓았을 정도이며, 나머지 방들에도 '트리스탄과 이졸데' '니벨룽겐의 반지'를 비롯한 바그너의 주요 오페라의 회화들로 가득 차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생전에 바그너는 이 노이슈반스타인 성에는 단 한 차례도 와보지 않았다. 루드비히를 만나던 곳은 이 성 건너편의 호숫가에 있는 호엔슈방가우 성으로 루드비히의 아버지 막시말리안 2세에 의해 세워진 노란색의 여름 별궁이다. 이 호수에는 많은 백조가 있어서 루드비히가 백조를 특히 좋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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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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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의 관광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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뢰머 시청사는 뢰머베르크의 북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기원전 50년경 진출한 로마군이 게르만족에 대한 방비를 한 곳이라서 '뢰머베르크 Romerberg' 라고 부르기 시작한 이 지역은 프랑크푸르트에서 옛 건물이 가장 많이 위치하던 성당의 서쪽에 위치한다. 1405년 프랑크푸르트 참의회가 뢰머베르크에 있던 3채의 귀족저택을 사들여 시청사로 개조했는데,그 중 대표적인 '뢰머저택'의 이름을 따서, 시청을 '뢰머'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뢰머는 구시청사의 핵심이며 프랑크푸르트의 역사적인 상징이 되고 있다.
3개의 뾰족한 건물 중에 중앙에 있는 것이 '뢰머'라고 불리우는 구시청 사 건물인데, 이 뢰머 2층의 크고 넓은 홀은 1562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처음으로 황제 대관식이 거행된 이래 황제의 넓은 방이라고 불린다. 신성 로마제국 새황제의 대관식 후에 축하연이 베풀어졌던 황제의 넓은 방인 카이저자르에는 '정의의 분수'가 있고, 남쪽으로는 아침, 점심, 저녁 등 1일 3회 40회의 종이 울리는 니콜라이 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또한, 황제의 방의 벽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52명의 실물 크기의 초상화가 장식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이 시청광장인 뢰머베르크 광장은 프랑크푸르트 구시가지의 중심이며, 최초의 박람회(Messe)가 개최된 곳으로,현재는 마인강 축제,5.1 노동절행사, 각종 문화행사와 대중집회를 개최하는 곳이기도 하다. 광장의 중앙에는 1543년에 건축된 정의의 여신인 '유스티아상'이 오른손에 검, 왼손에는 저울을 들고 서있다. 그리고, 뢰머베르크 광장에 면해 있는 프랑크푸르트 시청(뢰머)은 박람회(Messe)에 참가하는 로마인들의 숙소와 전시장으로 사용된데에서 지금도 시청사를 뢰머(Romer)라고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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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바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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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트라의 관광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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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트라(2663m)는 폴란드와 슬로바키아 국경지대에 걸쳐있는 알프스 산맥 중 하나이다. 총 면적의 3/4이 슬로바키아에, 나머지 1/4이 폴란드령에 속한다. 양측 타트라는 모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1949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타트라스 국립공원(TANAP)은 슬로바키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총면적 741㎦로, 서부와 하이 타트라의 슬로바키아 지역과 비엘스키에 타트라 전 지역을 포함한다. TANAP의 경계로는 북쪽으로 슬로바키아-폴란드 국경선, 동쪽으로 ZDIAR-TATRANSKA KOTLINA ROAD, 남쪽으로 산림구분선 그리고 서쪽으로 SUCHA DOLINA 계곡이다. 공원측의 삼엄한 보호로 인해 현재 이곳에는 수많은 희귀 동식물들이 서식하고 있어 때묻지 않은 자연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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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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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의 관광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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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국립오페라는 성슈테판사원에서 케른트너슈트라세를 통해 이어진다. 음악의 도시 빈의 대표적인 오페라장인 만큼 바그너와 모차르트, 리하르트 슈트라으스 등의 오페라 연주에서 세계 제일이라는 평판을 듣는다. 또한 파리의 오페라 드 가르니에, 밀라노의 라 스칼라와 함께 유럽 3대 오페라 하우스로도 유명하다. 오페라 하우스, 링크를 중심으로 하는 건축물 가운데 최초로 완성된 곳으로. 오페린 링크와 케른트너 거리의 모퉁이에 있는 아름다운 르네상스 양식의 오페라 극장이다. 장려한 외관에 어울리게 내부도 고블란으 태피스트리와 모짜르트의 마적을 주제로 한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화려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1869년 모짜르트의 (돈조반니)를 개관기념 작품으로 올렸다. 구스타프 말러가 음악감독으로 있던 1897-1907년 사이의 10년간이 전성기 였으나 제 2차 세계대전 때 많이 파괴되었다. 개축하면서 최신식 무대 장치를 갖춰 새로운 느낌으로 바뀌였으며 1977년 카라얀이 지휘봉을 잡으면서 제2의 황금기를 구가했다. 이 곳은 개관한 이래 5-6월에는 예술음악제, 오월에는 대무도회가 개최되는 등 연주호가 활발하게 열리고 있다. 매년 9월에에 시즌이 시작되어 연간 300회 이상 오페라 공연과 뮤지컬도 한다. 오전과 오후 두차례 실내 입장이 허용되는데, 오페라 하우스 좌측 모퉁이의 입구에서 표를 사면 언어별(영어,불어)가이드가 나와 약 30분 정도 내부를 구경시켜준다.
* 전화/팩스 : 전화 : +43 (1) 51444-2250
* 주소 : Adresse 1010 Wien, Opernring 2
* 홈페이지주소 : http://www.wiener-staatsoper.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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쉔부른 궁전의 '쉔'은 아름답다는 뜻이고, '브룬'은 샘 또는 분수를 뜻하고 있다. 즉 아름다운 분수가 있는 궁전이라는 위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1744년에서 1750년까지 피가시의 손에 위해 완성된 것이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숨결이 아직도 느껴지는 듯한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별궁으로 베르사유 궁전에 견주어서 만들어진 화려한 왕궁이다. 한편 이 궁전은 그녀의 딸 마리아 앙뜨와네뜨가 15세까지 지내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궁전 내부에는 총 1441개의 방 중 45개만 공개하고 있는데 특히 모차르트가 6살 때 Maria Theresia 여왕 앞에서 연주와 구혼을 했던 Spiegelssaal '거울의 방'과 1814 ∼ 1815년에 나폴레옹 이후의 유럽 정세를 의논하기 위해 열린 빈 회의 때 화려한 무도회가 펼쳐진 '대 홀'과 나폴레옹 2세의 '회상의 방', 마리아 테레지아의 중국식 좌담실 Chainesisches Rund-kabinett등이 유명하다. 또한 실내 천장엔 프레스코화, 크리스텔 샹들리에와 금박 장식으로 멋지게 치장되어 있다. 이 밖에 궁전 내에는 1690에서 1918년까지의 마차가 전시되어 있는 궁전 마차 박물관(Wagenburg)이 있다. 중앙 건물은 황제의 생활관으로 이곳에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프란츠 요셉과 마직막 황제인 카알 1세 등의 유물을 볼 수 있다.
궁전 건물을 지나면 약 1.7㎢에 달하는 끔찍하다고 할 만큼 잘 다듬어진 정원수가 너무 인위적이라는 느낌을 주는 왕궁 정원이 나온다. 이 궁전 안의 공원은 고전과 결합한 로코코 양식의 아름다운 바로크 정원으로 툰의 생과 로마 유적 그리고 그리풍의 글로리에테가 있다. 이 곳에 오르면 훌륭한 전망을 볼수 있고 또한 화단의 기하학적인 아름다운 많은 분수, 조각상 등이 한데 어울러진 멋진 정원이다. 또한 700여종의 동물들이 있는 유럽에서 가장 오랜된 동물원이 있다. 또한 열대 식물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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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의 상징인 슈테판 사원은 오스트리아 최대의 고딕 양식 건물로 하늘을 찌를 둣한 웅장한 자태를 자랑한다. 사원 안은 바로크 양식으로 되어 있는데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3세의 무덤도 있다.12세기 중엽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었으나 1258년의 화재로 서쪽벽면을 제외한 전체 건물이 없어져 버렸다. 한 세기 반에 걸쳐 네이브가 고딕양식으로 건축되였다. 스테판 사원의 건축은 다양한 양식이 한데 어우러진 멋진 사원으로 정면을 감싸고 있는 전면부는 13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이며, 높은 뾰족탑과 현란한 스테인드 글라스는 고딕 양식이다. 성가대석 오른쪽 프리드리히 3세의 묘는 르네상스 양식, 그리고 이어진 주 제단 등은 바로크 양식으로 되여 있다.
137m 높이에 화살처럼 뾰족한 첨탑이 있는 거대한 이 성당에서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결혼식을 오렸으며 장례식을 치른 곳으로 유명하다. 또한 길이 65m에 넓이 35m의 십자가현의 성당 지붕은 선명한 청색과 금색 타일로 모자이크 되어 있다. 카타콤베라는 자하묘지에는 오스트리아 역대 왕들의 심장 및 내장이 수납된 항아리도 보관되어 있다. 이외에 각종 장기가 전시되고 있고 단체 관광으로만 관광이 가능하다. 대주교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타콤베 출입구는 성당 중앙의 왼쪽 허리 부분이며 북탑 입구에 있다. 남탑은 343개의 계단을 통해 70m 높이 테라스까지 올라갈 수 있다. 북탑의 테라스에는 푼메른이 있는데 이종은 원래 터키와의 전쟁으로 얻은 대포를 녹여 만든 것으로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큰 종이다. 북탑에는 리프트가 있어 쉽게 올라갈 수 있다.
남쪽의 큰 뜰을 지나 왼쪽의 좀 더 작고 지저분한 뜰로 들어가면 Royal Chapel(왕가 성당)과 왕가 보물 보관소(Schatzka-mmer)가 있는데, 이곳엔 1000년이나 된 유물과 보물, 그리고 왕관을 장식했다 보석들이 있다. 이 곳은 한 시간안에 관광 할 수 있는 곳이다
* 이메일 : office@stephansdom.at
* 전화/팩스 : 전화 : +43 515 52-3526
* 주소 : Stephansdom 1., Stephansplatz U1, U3: Stephansplatz
* 홈페이지주소 http://www.stephansdom.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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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로 오페라 극장에서 슈테판 성당까지 이르는 보행자 전용거리이다. 거리 양옆으로 각종 선물가게, 카페, 레스토랑이 몰려 있으며 간혹 거리에서 악기를 연주하거나 거리 공연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거리는 비교적 브랜드 있는 상점이 있는 곳으로 깨끗하게 정리된 거리다. 밤에는 상점에서 장식한 네온사인이 함께 어우러져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여행자들이나 현지인들이 많이 오는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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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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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부르크의 관광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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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테레지아 거리는 광장 거리라 불리 우는 곳으로 개선문에서 구시가를 향해 북쪽으로 뻗은 거리로 인스부르크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다. 이 광장 거리에서는 해발 2,334m의 바위산 Nordkette의 아름다운 경치가 보이며 계곡을 따라 밑으로 가면 Spitalkirche(스피탈 교회)와 종루의 둥근 탑들이 있다.
또한 길 양쪽으로 오래된 가게들이 줄지어 서 있고 거리 중앙에는 푸르스름한 황토색 배경에 하얀 색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안나 기념탑은 스페인계승전쟁 동안 침입자들을 격퇴한 것 을 기념하기 위해 1706년에 세운 것이다. 13m 높이로 세워져 있으며 탑 꼭대기에는 성모상이 있다. 또한 아마추어 사진 작가들의 전통적인 사진 주제로 각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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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알려진 삼차원적인 박물관으로서 비엔나 출신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가 앙드레 헬러의 기획으로 95년 가을에 과학과 예술, 오락의 결정체로 탄생한 수정세계는 나지막한 언덕에 손 모양의 거대한 미로, 신기한 놀이터, 아름다운 정원과 공원에 둘러싸인 동굴 형태를 하고 있다. 이 곳은 스와롭스키의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크리스탈 박물관이다.
6백 평 규모의 내부에는 크리스탈을 소재로 각각 다른 테마를 갖고, 화려하고 미묘한 환상의 세계로 안내하는 여섯 개의 방으로 꾸며져 있다. 마법의 동굴을 지키는 듯한 초록빛 거인의 머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세계에서도 가장 큰 크리스탈과 가장 작은 크리스탈이 전시되어 있는 메인 홀이 있다. 또한 극장처럼 꾸며진 "크리스탈 행성"에는 대형 스크린에서 벌어지는 3차원 영상 세계를 통해 크리스탈이 연출되는 은하수의 초현실적인 풍경에 시간의 흐름을 놓치게 할 정도이다.
엄청나게 큰 크리스탈의 안으로 발을 들여 놓은 듯한 "크리스탈 돔"에서는 음향 효과에 조명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크리스탈의 매혹적인 색상과 소리를 즐길 수 있다. 또한 "크리스탈 명상실"은 크리스탈 구조물과 빛의 파동이 엮어 내는 현란한 무늬로 음향과 시각의 조화를 보여준다. "크리스탈 극장"은 꿈을 현실로 바꿔 놓은 곳으로 사방에 서 있는 크리스탈 조각과 설치물들이 찬란한 빛과 어우러져 동화의 세계 속에 들어온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마직막 방인 "얼음 통로"는 보이지 않는 축을 따라 벽과 바닥에 설치된 12개의 모니터로 구성이 되어 차가운 얼음색을 연출하면서 추상적인 형태들이 나타나 시간 속에 얼어 붙은 그림들을 담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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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시가에 막다른 길에 위치한 3층 발코니를 덮은 차양이 번쩍번쩍 빛나는 건물은 인스부르크의 랜드마크로 1500년에 완성된 것이다. 막시밀리 1세때 광장에서 비앙카 마리아 스포르자와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이 집은 티롤지방의 한 가난한 공작 프리트리의 집이 었는데 모여든 구경 꾼들이 금화를 던져서 지붕이 온통 금으로 덮이게 되었다 하여 이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지붕은 2,657장이나 되는 금박을 입힌 지붕으로 풍부한 장식이 있는 고딕 양식으로 르네상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2층 난간에는 각 지방의 문장들이 섬세한 띠 모양으로 새겨져 있으며, 3층에는 풍부하게 장식된 로지아(거실용 발코니)가 있다. 이 건물의 내부는 동계 올림픽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곳에는 올림픽 경기의 우표들도 수집되어 있다. 박물관과 타워의 콤베네이션 티켓을 구입하면 알프스와 시내의 전경을 볼수 있는 사립 타워에 오를 수 있다. 근처에는 황금 독수리 호텔이 있는데 이 곳은 60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유명한 호텔로 1780년에는 괴테가, 1832년에는 하이네가 묵었다고 한다.
* 가는방법 : 트램 1, 3, 6,번이 다니고 버스 O, L, K , N이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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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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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쯔감머구트의 관광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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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트 이슐에서 북서쪽 장크트 볼프강 호수 근처에 자리잡고 있는 장크트볼프강(St. Wolfgang)은 동화에 나올 듯 아기자기한 거리와 호반의 산책로가 무척 아름다운 곳이다. 이곳에서 등산열차를 타고 샤프베르크(Schfberg)산 정상(1,783m)에 오르면 짤츠캄머구트 일대의 경관이 한 눈에 들어온다. 장크트볼프강 호수는 짤츠캄머쿠트의 대표적인 호수로 맑고 푸른 수면에 주위의 숲과 샤프제르크 산이 비치는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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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츠캄머구트의 진주' 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할슈타트 호수가에 있는 마을이다. 여행자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곳으로서, 선사시대 때부터 바위소금을 채굴해 온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마을의 선사 박물관에는 2,500년 전의 소금 채굴도구와 출토품이 전시되어 있다. 할슈타트에는 아직도 소금광산이 있어서 광석차를 타고 들어가 견학을 할 수 있다. 길이가 10km 넘는 거대한 규모의 광산의 벽에는 아직도 소금이 붙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조명등의 불빛을 받아 빛나는 모습이 마치 수정같다. 소금광산 투어에 참가하면 설명을 들으면서 살펴볼 수 있다. 바트 이슐에서 버스로 35분 정도 소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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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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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쯔부르크의 관광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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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츠부르크에서 가장 넓은 광장으로 구시가의 중심 광장이다. 광장 중앙에는 1659-1661년에 만들어진 바로크 양식의 분수가 서 있고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건물은 12세기에 시작하여 16,17,18세기 동안에 재건되어진 레지덴츠다. 레지덴츠는 역대 대주교들의 궁전으로 내부에는 사교의 방에는 사교들의 침실과 대사교의방, 도서관등이 있다. 또한 모차르트가 연주했던 홀을 비롯해 황제의 방, 프란치스카나 교회로 빠지는 숨겨진 문등이 있다.
레지덴츠 갤러리에는 렘브란트, 루벤스등 16-19세기에 이르는 유럽화가들의 그림인 회화가 약 200여점이 소장되어 있다. 4마리의 말이 물을 내뿜는 레지던츠 분수는 알프스 이북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레지던츠 광장의 종탑에서는 매일 07:00, 11:00, 18:00에 종이 울린다. 그냥 종소리가 아니라 35개의 크고 작은 종이 맑은 음색으로 모짜르트의 가극 "돈 죠반니"에 나오는 미뉴에트등을 연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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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츠부르크의 가장 중요한 여행지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중심 쇼핑가인 게트라이데 거리 9번지에 있는 당시 중산층이 거주하던 황색 건물 3층에서 1759년에 태어나서 17세까지 살았다. 어릴 때의 작품은 거의 모두가 이곳에서 작곡되었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1층에는 그가 생전에 사용하던 침대, 모차르트가 쓰던 바이올린, 낡은 피아노, 필사본 악보 그리고 초상화, 편지 등이 전시되어 있고, 2층에는 모차르트와 그의 오페라, 3층에는 모차르트의 가족들, 4층에는 잘츠부르크에서의 모차르트의 생활상이 소개되어 있다. 이 곳은 전 세계의 많은 음악 애호가들이 생가를 방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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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에서 가장 유명한 정원으로, 지금은 일반인들의 공원으로 되었다. 이 정원은 17세기에 바로크 스타일로 디자인된 것으로, 분수와 연못, 대리석 조각물과 꽃등으로 장식되어 있다. 정원에 있는 미라벨 궁전은 1606년에 세워졌는데 1818년 화재로 수복되어 오늘날 같은 모습으로 되었다. 17세기초 디트리히 대주교가 사랑하는 여인 살로메를 우해 세운 궁전으로 대리석 홀은 모차르트가 대주교를 위해 연주했던 곳으로 지금은 실내악 연주를 열곤 한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무대에서 여주인공 마리아가 어린이들과 함께 '도레미 송'을 불렀던 곳이라 해서 더욱 유명해진 정원으로 유명하다. 장미 화원에는 조각들과 호수를 감상 할 수 있다. 이곳에서 호엔 잘츠부르크 성의 전경을 올려다 보면 성의 모습이 황홀할 정도다.
* 가는방법 : 중앙역에서 Rainerstrasse를 따라 조금만 내려오면 바로 오른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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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츠부르크의 음악제가 처음 시작된 대성당 광장에 있는 대성당은 구시가의 중심에 있다. 이 곳에는 1771년에 제작된 마리아 상이 서 있다. 원래의 대성당은 8세기에 지어졌으나 화재로 파괴되었다. 현재의 돔은 17세기 초 40년에 걸쳐 완공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말기적 성격을 띠고 있는 바로크식 건축물로 이곳에서 1756년 모짜르트가 세례를 받았다.
입구에 들어서면 대리석 조각상인 베드로와 바울, 잘츠부르크의 수호 성인 들이 있다. 세계의 청동 대문은 믿음, 소망, 사랑을 상징한다. 안에는 유럽에서 가장 크다는 파이프 오르간이 있는 데 6천가닥의 파이프가 사용되어졌고, 음색을 바꾸는 레지스터의 수도 101개나 된다고 한다. 또한 10000명을 수용할수 있는 알프스 이북에서 가장 큰 바로크 성당이다. 대성당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가면 대성당의 보물, 그림, 시계, 가구등을 전시하고 있는 대성당 박물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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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엔잘츠부르크 성은 원래 1077년에 게브하르트 대주교 지시하에 건축이 시작하여 17세기에 지어진 중세의 성으로 구시가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시내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잘츠부르크의 상징물이다. 동시에 중유럽에서 현재까지 파손되지 않고 보존된 성들 중 가장 큰 성으로서 웅장한 성의 그림자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들 중 하나이다.
이곳은 석회암 위에 세워졌는 잘츠흐강 보다 120m 높이로 세운 웅장한 대주교 성채이며 성 안에는 의식 홀과 황금홀, 1501년에 만든 고딕 앵식의 마 요르카구이 난로, 1501년에 만든 수동식 파이프 오르간이 있다. 이 오르간은 하이든, 모차르트가 쓰던 것이다. 또한 건축물 내부에는 부르크 박물관이 있어 중세의 고문기구, 무기류, 공예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구경거리가 있어서 흥미 진지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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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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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관광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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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신시가지의 일각을 형성하는 최대의 번화가이다. 고단한 체코의 역사가 베어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하철 A선과 B선이 교차하는 무스테크 역이 있는 무스테크 광장을 중심으로 L자형으로 교차하는 이 광장은 광장이라기보다는 파리의 샹젤리제처럼 "boulevard"를 이루고 있는 바, 넓이는 무스테크 광장에서 국립 박물관까지 길이 750m, 폭 60m의 대로로서 서울의 명동거리에 비 할 만 하다. 거리 양쪽에는 유서 깊은 호텔과 고급 레스토랑, 백화점, 은행, 사무실들이 늘어서 있고, 휴일에는 늘 인파로 붐비며 여름에는 아래쪽의 무스텍 광장 주변이 노천 까페가 들어선다. 국립박물관의 테라스에서 광장을 내려다보면 광장의 양쪽으로 늘어선 건물의 모습을 자세히 구경할 수 있다
이 광장은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말 시장으로 이용되었던 곳으로서 체코 역사의 전환기에는 반드시 등장하는 장소였다.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몰락으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이곳에서 선포되었고, 1948년에는 공산당이 권력을 장악하여 사회주의 공화국이 이 곳에서 선언되었다. 1968년에는 두브체크로 대표되는 개혁공산주의자들이 시도한 '프라하의 봄'이 소련군 탱크부대의 침공으로 많은 체코국민들이 생명을 바친 곳으로도 유명하며, 1989년 11월 18일 프라하 예술아카데미의 학생들과 배우들이 공산정권에 항의하는 데모를 시작하여 결국 자유주의를 획득하였던 '벨벳 혁명'의 역사적 현장도 바로 이곳이 중심지였다. 광장의 동쪽 끝에 보이는 중앙청 모습의 건물이 이 나라의 국립박물관이다. 폭 100m, 높이 70m에 이르는 이 박물관은 광물·동·식물 표본 등을 전시한 자연박물관으로서 국립극장, 예술의 전당과 함께 19세기 후반 체코의 네오 르네상스 건축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꼽힌다. 천장과 1층 방에는 체코 역대 유명인사의 그림과 청동 흉상이 전시되어 있다. 광장에서 국립 박물관 쪽으로 서 있는 동상은 보헤미아의 수호신인 성 바츨라프의 기마 상. 성 바츨라프는 국난의 시기에 중부 보헤미아의 그라니크 동굴에 잠들어 있는 기사들을 깨워서 이끌고 적을 격퇴시켰다는 전설의 왕으로서, 기마 상 앞뒤로 3명의 수호성인인 성 루드밀라, 성 프로코피우스, 성 아그네스의 기념상도 함께 볼 수 있다. 이것은 J.V. 미슬베크의 작품으로 예전의 바로크 식 조각을 대신하여 1913년에 이 광장에 들어섰다. 현재는 동상 아래에 각종 무대가 마련되어 있어 정치 집회나 콘서트 등이 열리고 있다. 동상 앞에는 '프라하의 봄'을 탄압하던 소련군에 저항하다 희생된 사람들(특히 21세의 나이로 분신 자살한 챨스 대학 학생 얀 파라프palach)과 1989년 혁명 당시를 기하는 꽃과 촛불, 사진들이 항상 놓여있다.
* 가는방법 : 지하철 A선과 B선이 교차하는 무스테크 역에서 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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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명물 천문시계(ORLOJ)는 15세기 프라하 대학의 수학교수였던 하누슈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 기발하고도 아름다운 시계에 대한 소문이 유럽 각 국으로 퍼지면서 다른 나라에서도 주문이 쇄도하였다. 그러자 이 시계를 독점하고 싶은 프라하 시청에서는 하누슈 교수가 두 번 다시 시계를 만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를 장님으로 만들었다는 슬픈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 후 자신이 만든 시계를 만져보기 위해 시계탑 위에 올라가 시계에 손을 댔을 때 시계 바늘은 그대로 멈추어 400년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1860년 수리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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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타바Vltava(우리에게는 몰다우Moldau로 알려져 있음)강 위에 서정과 낭만이 가득한 황혼을 배경으로 펼쳐진 다리가 카를 다리(챨스 브리지Chales Bridge)이다. 1357년 건설하기 시작하여 1406년 카를 4세에 의해 완공되었다. 동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로 현존하는 유럽 최고의 다리로 손꼽힌다. 이곳에는 예전에 유디타 다리Juditin most라는 이름의 다리가 있었으나 1342년의 홍수로 소실된 이후 당시에 최고 수준의 기술을 동원하여 새롭게 세운 것이 카를 다리라고 한다. 길이 520m, 폭 10m의 보행자 전용으로 차량통행이 금지되어 언제나 노점상과 거리의 예술가, 관광객들로 붐 빈다.
다리의 가장 큰 특징은 조각상이 양측 난간에 15개씩 합계 30개가 늘어서 있다는 것이다. 로마 산탄젤로 성에 있는 베르니니의 조각에서 힌트를 얻어 1683년부터 프라하의 기독교 순교 성자인 중요한 네포무크의 조각상을 시작으로 기독교 성인 30인의 조각상(사암을 사용)을 다리 난간에 세우게 되었다. 이 다리가 세워진 후 점진적으로 카톨릭은 중세 생활권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으로 입지를 굳혀 갔다. 17~19세기에 걸쳐 제작된 이 동상들은 성서를 주제로 만들어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다리의 양끝에는 총 3개의 탑이 있다. 그 중 프라하 성 쪽으로 두 개의 탑이 있고, 구 시가 쪽으로 하나의 탑이 있다. 프라하 성 쪽의 두 탑 중 조금 낮은 탑은 주디교의 잔재로 로마네스크양식으로 지은 것이며, 키 큰 탑은 15세기의 고딕양식으로 지은 것이다. 구 시가지 쪽의 탑은 14세기에 만든 것으로 유럽 고딕양식의 최고봉에 속한다. 이 탑들은 원래 통행료를 징수하거나 다리를 지키기 위하여 만들어졌으나 현재는 일반에게 개방되어 있다. 다리를 건널 때는 프라하 성 쪽을 향한 난간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다리 중간쯤의 난간에 독특한 모양의 부조가 새겨져 있는데, 그 위에 손을 얹고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한번씩은 만지고 가기 때문에 그 부분만 반들반들 윤이 나서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카를 교에 석양이 비치며 떠오르는 실루엣을 프라하 성에서 내려다보는 것은 프라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경이다. 여름 밤에는 다리 곳곳에서 노래판이 벌어지기도 한다. 사람들이 모일 수 있도록 터 놓은 자유공간, 세계 각지의 젊은이들은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우정을 나누기 위해 이 곳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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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시청사 맞은편, 킨스키 궁전 바로 옆에 위치한 틴 성당은 하늘을 찌를 듯한 멋진 첨탑이 인상적이다. 1365년 세워진 이 교회는 금장식을 정점으로 하는 두 개의 탑이 높이 80m에 이른다. 화려한 외관은 초기 고딕양식을 띠고 있지만 내부는 바로크 양식으로 음울한 분위기이다. 이 교회에서 가장 볼 만한 것은 북쪽 벽에 있는 로코코 스타일의 거대한 제단과 아름다운 동북쪽의 출입문이다. 이 곳에서는 종종 클래식 콘서트가 열리며 특히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의 연주가 기막히다.
교회 바로 옆에는 카프카의 생가도 있다. 체코 계 유대인 작가인 프란츠 카프카가 1883년에 태어난 곳이다. 카프카는 초현실주의 기법으로 현대인의 고립과 불안을 묘사한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적 작가이다. 독일에서 활동하다 빈에서 죽은 기구한 운명을 가진 작가로 그의 작품 '변신', '심판', '성' 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가 볼만한 곳이다. 그와 관련된 자료 및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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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유명한 아름다운 프라하 야경,볼타바강변에서 바라본 프라하 성과 카를교의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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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도시 프라하의 심장이 되는 곳이 프라하 성이다. 체코를 찾는 이들의 대부분이 프라하 성(특히 야경)을 보기 위해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프라하 관광의 핵심이 된다. 로마네스크 양식에서 고딕과 르네상스, 바로크, 네오 고딕에 이르는 천년 이상의 건축사를 웅변한다. 체코의 국가적 상징물인 동시에 통치자들의 궁전으로 870년경 처음 건축되기 시작된 이래 수 차례의 변천을 거쳐 14세기 카를 4세 때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918년 이후로는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고 있다. 성 정문 앞에서는 매시 정각에 근위병들의 교대 식이 행해진다. 이 중 정오에 벌어지는 교대 식이 가장 볼 만하다. 이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파노라마는 프라하의 역사를 건축미술을 통해 한 눈으로 읽게 해주고 있다.
길이 570m, 폭 128m인 프라하 성은 전 세계의 현존하는 중세양식의 성 중 가장 큰 규모이다. 동서로 길게 펼쳐진 이 성의 입구는 흐라트차니 광장에 면한 서쪽 정문과 말라스트라나 쪽의 동문, 성 정원쪽의 북문이 있다. 각 문에는 위병 2명씩이 지키고 서 있다. 위병은 7시부터 23시까지 1시간마다 교대한다. 정분에서는 매일 정오에 화려한 위병 교대식이 펼쳐지기도 한다. 프라하 성이 현재의 중요성을 갖게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14세기 카를 4세(1346~78년 재위)때의 일이다. 그는 왕궁을 재건하고 성 비토의 성당을 세우면서 프라하 성을 완전히 새로운 모양으로 단장하는데 이 때부터 이 성은 국가적 상징물이 되었다. 15세기 말 국왕이었던 블라디슬라프 2세 치하에서 후기 고딕 양식적인 요소가 가미되었고, 1526년 합스부르크 왕가가 보헤미아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했을 때부터 르네상스 적인 건축이 프라하 성을 점점 복잡하고 정교한 것으로 말들었다. 프라하 성의 건축 양식상 완결은 바로크시대에 이루어졌다. 1753년~1775년 사이에 외관은 현재와 같이 결정되었고, 1918년 대통령의 관저로 바뀌면서 건축가 Josip Plecnik에 의해 성의 내부장식과 정원이 새로 정비되었다.
프라하 성은 수많은 건물들이 모여 하나의 로열 타운을 이루고 있는데 중심 건물은 성 비토 성당이다. 정문에서 바로크 빌딩으로 둘러싸인 게이트를 두 번 지나면 나온다. 카를 4세 때 부터 짓기 시작한 성비토 성당은 50년 이상에 걸친 네오 고딕양식(1873~1929)의 가미와 함께 약 6백년의 공사기간을 기록하며 완성되었다. 내부에 있는 스테인드 글라스가 뛰어나다. 스테인드 글라스는 체코의 화가 알폰소 무하의 그림으로 1936년에 만들어 졌다. 성내의 다른 기념물로는 성내에서 가장 오래된 성 이르지 교회가 현존하고 있다. 성 옆의 계단 위에 서면 유유히 흐르는 블타바강과 아름다운 프라하 시내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다. 관광안내센터에서는 프라하 성의 간단한 지도 및 관광자료(주로 영어 표기)를 제공하는 이외에 기념품이나 선물 용품 등도 판매하고 있다.
* 가는방법 : 프라하 성까지는 말라스트라나에서 언덕을 올라가 이동하는 방법이 가정 일반적이다. 말라스트라나 광장에서 네르다 거리로 들어가 걷다가 도중에 커다랗게 꺽어진 Ke Hradu거리의 언덕을 끝까지 올라가면 프라하 성 입구인 흐랏챠니 광장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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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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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카우의 관광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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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시가지의 남쪽 비슬라 강 상류에 위치하고 있는 바벨성은 500년동안 폴란드 왕이 거처했던 둥전으로 유명하다. 성의 역사는 9세기 초부터 시작되며,1502~1536년에 걸쳐 르네상스 양식으로 개조되었다.
* 전화/팩스 : 전화/팩스 : +48 12 421 5177
* 주소 Wawel Royal Castle 31-001 Kraków, Wawel 5
* 홈페이지주소 : http://www.wawel.krakow.p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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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코프에서 남동쪽으로 13km 거리에 있는 비엘리츠카는 암염이 생산되어 온 곳이다. 약 10세기에 이 곳에 소금 제조장이 있었던 흔적이 발견되었고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암염이 생산되는 곳으로 소금바위가 많아 지하 100미터 정도에는 전시장이 만들어져 있는데 9시부터 4시까지 열린다. 전시장에는 비엘리츠카으 역사와 소금 파내는 방법을 보여주는 전시실이 있으며, 소금으로 이루어진 수많은 조각품과 예배당도 있다. 여기에는 14개의 작은 방이 있고 그 안에는 소금 바위 전시장, 복도, 예배당, 수많은 조각품들이 있다. 크리스탈 동굴은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것으로 1928년 이래로 염격하게 보호되고 있다. 비엘리츠카로 가는 교통편은 기차역 앞에서 운행되는 소형버스를 이용한다. 700년의 역사를 가진 이곳은 크라쿠프의 남동쪽으로 1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자동차로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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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쿠프 서쪽으로 61km 떨어진 곳에는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 히틀러의 악명이 높은 폴란드어로 "오쉬비엥침"이라고 하는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세워져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전체 28동으로 되어 있고 150만명이 목숨을 잃은 곳이다. 빨간 벽돌건물들로 되어 있으며 현재는 박물관과 전시관으로 꾸며져 있는데, 유태인을 처형했던 가스실과 처형당한 사람들의 사진, 시체를 태웠던 소각장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비극의 역사를 생생하게 느낄수 있다. 아우슈비츠는 1947년에 세워진 희생자 박물관은 1979년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의 철문에는 독일어로 ARBEIT MACHT FREI(일하면 자유로워진다.)라고 써있고 그 유명한 나치가 개발한 가스는 한 통으로 400명을 죽일 수 있는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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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시가지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넓은 관장으로 중세 유럽 광장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이곳은 예전에 크라코프의 사교장으로서의 역활을 했던곳이며, 주위에는 옛 크라코프 귀족들의 저택이 즐비하다. 광장 중앙에는 고딕과 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된 흰색이 직물회관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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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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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의 관광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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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겔레르트 언덕(Gellert-hegy)은 다뉴브강 수면으로부터 140m, 둘레 135m로서 밤에 내려다보는 다뉴브강의 전망이 특히 아름답다. 정상에는 호텔, 레스토랑이 있고 남쪽에는 소련군이 헝가리를 나찌로부터 구해준 것을 기리기 위한 높이 34m의 해방기념비가 있다. 8월 20일인 헌법 기념일에는 언덕 위에서 불꽃놀이가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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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뉴브 강변의 네오 고딕 양식의 궁전같은 건물이 바로 국회의사당이다. 건국 1000년을 기념하여 1884~1902년에 건축되었다. 뾰족 지붕이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으며 건물 벽에는 헝가리 역대 통치자 88명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건물 내부에는 691개의 방이 있고 앞의 광장에는 헝가리의 영웅인 코슈트(Kossuth)와 라코지(Rakoczi)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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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에 지어진 고딕식 건물로 역대 헝가리 왕들이 대관식을 올렸던 곳이다. 마차시라는 이름은 1470년 마치시 왕의 명령으로 교회 첨탑이 증축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네오고딕 양식의 건물로서 빈의 성 스테판 대사원과 비슷하다. 15세기 마차시 1세때 높이 88m의 첨탑이 증축되어 현재의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역대 헝가리의 왕이 대관식을 거행했으며, 매주 일요일 아침에 관현악단과 합창단의 반주에 추어 장엄한 미사가 거행된다. 매주 금요일 밤에는 오르간 콘서트가 열린다.
* 이메일 : turizmus@matyas-templom.hu
* 전화/팩스 : 전화/팩스 : +36 1 489-0717
* 주소 : MÁTYÁS-TEMPLOM - H-1014 Budapest, Országhá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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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의 언덕 남쪽에 있는 네오바로크 양식의 부다 왕궁은 부다페스트의 상징이다. 13세기에 세워진 것으로서 일반인에게 공개되지는 않지만 역사 박물관 헝가리 노동운동 박물관 국립 미술관은 공개된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왕궁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현재의 모습은 1950년대에 완성된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파괴된 것을 복구하면서 수많은 유물들이 발굴되었고 이 유물들은 역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노동운동 박물관에는 헝가리 투쟁운동과 사회주의 아래의 헝가리의 모습을 담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고, 국립미술관에는 11세기부터 현재까지의 현재까지의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다.왕궁의 북쪽으로는 빈의 문광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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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의 요새는 네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뾰족한 고깔 모양의 일곱 개의 타워로 설계되어 있고 각 타워들은 수천년전에 나라를 세운 일곱 개의 마자르 족을 상징한다. 하얀색의 화려한 성벽과 마차시 교회까지 뻗어있는 계단은 관광객으로 하여금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들 정도로 아름답다.
이 요새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옛날에 어시장이 있었던 곳이기 때문이라는 설이고, 다른 한 가지는 18세기에 어부들이 성벽에서 적군을 방어했다는 설이다. 이 곳에서는 다뉴브 강변의 아름다운 페스트 지구의 도시와 후방의 헝가리 평야가 넓게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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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헝가리 건국 1000년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광장이다. 중앙에는 민족의 수호신 가브리엘 천사 동상이 말탄 기사들에 의해 에워싸여 있고 그 주변에는 헝가리의 왕, 정치가, 장군 등 유명인의 동상이 주위에 나란히 서 있다. 국가적인 행사장으로 자주 이용되며 행사동안에 기념비는 군인들에 위해 호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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