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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야벨리는 누구인가? 본문

나의이야기/삶의지혜

마키야벨리는 누구인가?

壹虛 2011. 10. 14. 11:30

마키야벨리는 누구인가?

 

 

1. 오해(誤解)받는 人物 . 偉大한 名著

 

 

 마키야벨리하면 權謀術數(권모술수)의 장본인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흔히 교활한 사람을 마키야벨리언이란 별명을 붙이기도 한다. 이를 대표한 그의 말로서 “여우의 교활함과 사자의 폭력”이란 말이 있다. 정치 사상가로서 오해받아온 인물중 순자, 한비자가 있으나, 마키야벨리처럼 심하게 오해받아온 사람은 없다. 그 이유는 서양의 정치서로서 “군주론”처럼 악인에게 이용당한 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이책을 충실히 터득해서 사용한 이용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 대하여는 선입관부터 달라지게 한다.

그러나 지금 국제정치를 볼때 우리가 절실히 느끼는 것은 정치와 윤리의 철저한 분리-나가서는 정치가 윤리를 압도하는 것이 아무꺼리낌 없이 정당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란 그 시작부터 윤리와 양립되기는 어려웠던 것은 아닐까 한다. 그렇다고 마키야벨리의 피상적인 말을 든 것이 아무런 조건없이 좋거나 그르다는것은 아니다. 정치 현상 자체가 단순한 윤리기준으로서 단정 지을 수 없이 복잡하다는 것이, 마키야벨리를 오해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권모술수의 장본인.謀士(모사)로서 마키야벨리

 

 

 중국이나 서양에서 정치를 논하는 경우에 옛날 정치의 이상이나 이상적인 지도자.치자의 조건이 다루어져 왔다. 플라톤의 국가론이나, 유교의 왕도정치사상은 어는 것이나 정치의 이상을 달성하기 위한 지도자나 치자의 이상형을 탐구하는 것이었다. 어진 임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그렇게 어진 임금이 정치를 한 때보다는 그렇지 않을때가 더 많았다.

그러나 사상가들이 모두 정치의 이상만을 논한 것은 아니다.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을 경험을 통하여 모색한 사상가도 있다. 중국의 한비자와 서양의 마키야벨리이다. 그런데 한비자와 마키야벨리는 모두 인간의 악한 면을 파헤치고 인간의 착한 심성에 크게 기대하지 않고 인간의 본성, 인간을 움직이는 것, 인간의 약한점 등을 알아서 그것을 최대한 이용하여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다는 점이다. 善政을 통해서 민중을 교화한다는 것은 기대하지 않았았다. 그래서 마키야벨리는 악덕이라도 필요하다면 좋은것 이라는 주장을 전개하였다. 이러나 그의 주장을 드러내 놓고 공개하여 받아 들이는것은 지배자들이 꺼려한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마키야벨리의 탄핵은 군주론이 출간되면서 현대까지 계속되고 있다.

마키야벨리는 군주론을 1513년에 몇 달 만에 탈고했다. 그는 이책을 자기가 기대했던 군주에게 바치려고 썼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가 죽은지 5년후인 1532년에 로마에서 출간되었다. 이책이 출간되자 1536년 추기경 레지날.포올은 그의 저서 “황제 카알 5세 변론”에서 “군주론”은 “악마의 소산”이라고 단정하고, 영국 헨리8세도 이 책의 독자에게 경고를 하고 있다. 그리고 1559년 로마 교황청은 마키야벨리의 모든 저작을 禁書(금서)로 낙인을 찍어 버렸다. 그 밖에 新敎徒(신교도)측에서도 탄핵했다.

마키야벨리 저작은 18세기에 계몽사상가들에 의해 보급되었다. 마키야벨리 저작들이 각국어로 번역됨에 따라 계몽군주 중에는 이를 반박하는 군주도 출현하게 된다. 그 중에 가장 아이러니컬한 것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반 마키야벨리론”(1739)이다. 이 저서는 프리드리히가 군주가 되기 전에 써서 볼테르의 손을 거쳐 출간되었다. 볼테르는 프리드리히가 장래 군주가 되면 정치는 좀더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리라 크게 감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군주나 정치가 중에서 프리드리히는 마키야벨리의 가르침을 가장 충실히 실천한 사람의 하나였다. 그는 자가 저서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짐은 인간성을 망가뜨리려하는 괴물에 대하여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서 일어났다. 짐은 궤변과 죄악에 대하여 이성(理性)과 정의(正義)로써 대결할 것이다. 짐은 마키야벨리의 군주론에 대하여 章(장)마다 反論(반론)을 펴 놓았다”라고.

마키야벨리의 탄핵은 현대에까지 끊이질 않는다. 1930년부터 전체주의(나치즘.파시즘)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여 인류의 公敵(공적)으로 등장하자, 그 전체주의 잔학성.부도덕성 속에 마키야벨리의 망령을 보고 그를 탄핵하기에 이른다. 물론 그들이 마키야벨리를 탄핵하는 것은 과거와 같이 정치상의 도의와 개인도덕을 혼동한 체하는 것이 아니지만, 정치가보다 고차적인 도의에 입각하여야 한다는 이상주의 입장에서였다. 특히 이러한 이상주의자가 강조한 것은 인간은 반드시 권력에의 의지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움직이는 충동에는 고매한것도 있다는 것이다. 마키야벨리의 정치감각은 현실성이 없는 좁은 기초 위에 선 것이라고 했다. 특히 영국과 미국의 사상가들은 정치의 궁극적 목적은, 國家理性의 우월이 아니라 오히려 그 목적은 개개인의 행복추구 이기 때문에, 정치는 윤리.도덕에서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였다. 이것은 마키야벨리를 권모술수의 악인으로 보는 정통적 견해로 되돌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면 마키야벨리는 그렇게 악인가?

 

 

-共和主義者이고 愛國者인 마키야벨리

 

 

 “군주론”이 발간된 후 250년 공안 마키야벨리는 “악마의 책”의 저자로서 규탄받아 왔다. 그에 대한 평가가 새로이 내려진 것은 계몽시대이다. 계몽시대의 사상가인 몽테스키외와 루소에 의하여서 이다. 루소는 그의 저서인“사회계약론”에서 군주에게 조언하는 듯하면서 실은 인민에게 위대한 교훈을 준 것이 군주론이고 따라서 그것은 공화주의자의 교과서라고 했다. 사실 군주론에서 마키야벨리가 용병제보다 민병제를 중요시하여 민병제를 채택하길 강력히 주장하고, 또 군주는 귀족에 의지하기보다 인민에게 지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19세기에 이르러 민족주의가 풍미하게 되자 마키야벨리의 군주론의 이탈리아의 국가적 독립에 대한 원망(願望)이라고 평가되기에 이르렀다.(헤르더) 특히 19세기에 이탈리아 자체가 민족통일이라는 시대적과제를 안고 싸우게 되자, 마키야벨리는 이탈리아가 외세에 억압.유린되던 당시에 자유와 해방을 위해서 싸운 애국자로서 입지를 새로이 하게 되었다. 이탈리아의 역사가 파스콰레.빌라리는“마키야벨리의 과제는 조국의 통일과 외세로부터의 해방이었다. 그런데 이 과제는 한 사람의 선진적 군주에 의하여서만 수행될 수 있는 사업이다. 또 이것은 역사와 경험에 의하여 배운 방법에 의해서만 달성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정치과학의 개척자

 

 

 마키야벨리는 정치의 세계가 윤리.도덕의 세계와 다르다는 문제의식을 제시한 사상가이다. 그는 지나칠 만큼이나 정치현상의 생리와 병리를 꿰뚫어 본 사람이다. 그는 정치의 세계에서는 오로지 힘이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는것 특히 정치무대에 등장하는 인간이라는 것이 어떤 윤리적 동기보다 이기적인 동기에 의해서 좌우된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했다. 그래서 그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선의(善意)나 종교적.도덕적 명분에 의존할수는 결코 없다는 것을 갈파했었다. 인간이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고 편파적인 동물이라면, 이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최대한으로 역이용하여 당면의 목적을 달성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이것은 정치가가 입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체험을 통해서 알고 또 그렇게 해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마키야벨리의 유산이 평가받게 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이다. 그로체는 1926년 그의 정치학개론에서 마키야벨리의 정치감각이 비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란 개인의 도덕 및 사회윤리에서 독립된 존재로서 이 자율성이야말로 국가 본래의 기능이라고 했다. 마이네케도“근대사에 있어서 국가 이성(理性)의 이념”(1925)에서 국가가 모든 것을 초월하여 자기의 목적을 추구하는 태도를 國家理性이라고 하고, 그는 마키야벨리가 이와 같은 근대적인 국가개념의 초석을 쌓은 인물이라고 했다.

오늘날 마키야벨리가 정치학상에서 중요한 과제로 되고 있는 것은 위에 든 두 사람의 이론을 출발점으로 해서인 것이다.

 

 

2. 르네상스時代의 社會와 政治

 

 

-르네상스의 정신(精神)

 

 

 르네상스란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전 유럽에 번진 희랍 및 로마의 고전부흥(古典復興)의 운동을 말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희랍.로마 시대의 부흥이다. 이처럼 르네상스는 고대의 부흥을 유력한 동기로 해서 일어난 것이기는 하지만 고대의 모방이 그대로 르네상스를 형성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 중심의 고대문화를 통하여 교권(敎權)에 얽매인 중세의 문화에 대하여 반기를 든 것이고, 나아가서 인간 자신을 발견하자는 인간중심적.현세적.현실적.합리주의적인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르네상스는 이탈리아를 발상지로 한다. 어째서 이탈리아가 르네상스의 모국(母國)이 되었는가? 본래 이탈리아는 로마 문화의 중심지이고 중세시대를 통해서도 고대 문화가 전혀 두절.단절된 채 방치되었던 것은 아니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르네상스의 발상지가 된 사회적 배경은 중세말에 이탈리아의 경제발전과 도시의 번영이다.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는 십자군 원정 이후 동방무역의 매개지로 발전되었다. 르네상스의 사회적 배경은 한 마디로 말해서 중계상업을 기축으로 한 도시사회의 번영이다. 르네상스의 정신의 형성에 큰 역할을 한 것은 그 시대의 상인정신이다. 미지의 세계에서 대담한 모험을 자행하고, 모든 거래에 있어서 철저히 타산하여, 내세의 축복보다는 현세의 실리를 따라서 오늘을 즐기고 사는 상인이야말로 르네상스의 주인공이다. 복카치오의“데카메론”은 르네상스시대의 인간 본연의 자세를 드러내면서 인간의 육체의 쾌락을 서슴치 않고 긍정하면서 중세적 권위의 무기력과 교권(敎權)의 위선(僞善)의 허위성을 야유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당시 인간성의 해방의 길이 트이자 각 부문의 천재들이 출현했다. 정치에 있어서 이러한 르네상스 정신은 일찌기 볼 수 없었던 대담한 인물을 배출시켰다.

이러한 르네상스 정신의 형성에 큰 역할을 한 당시의 상인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산업자본과 연계되고 있는 근대적인 상인이 아니라 스스로 모험하고 개척하며 또 싸우는 원거리 통상의 모험상인이였다. 말하자면 귀족적이고 시민적이고 투쟁적이며 모험적인 상인이였다. 이들 상인이 도시를 번영시키고 새로운 사회 문화의 지주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르네상스가 바로 근대정신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르네상스는 중세와도 끊을 수 없는 관계를 기지면서도 한편 근대정신에의 새 싹을 가지고 있다. 만일 우리가 근대정신의 특징인 개인주의.현세주의.합리주의를 바르게 이해한다면, 이것을 곧 르네상스에서 완성된 모습으로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볼 때에 그것은 18세기 계몽시대에 어느 정도 제 모습을 갖추고 나타난다. 따라서 르네상스 문화에 전근대적인 요소가 흔히 눈에 뛰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우리가 마키야벨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이점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도시국가(都市國家)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사회=정치의 특색은 도시국가의 번영이다. 이탈리아의 도시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도시도 들 수 있다. 그런데도 이탈리아 도시의 발흥에 주목하게 되는것은 첫째,이탈리아에 있어서는 로마시대이래 도시생활의 전통이 지속되어 왔다는 것, 둘째,이탈리아 도시의 급속한 발흥은 상업의 번영에 원인이 있다는 것등 때문이다. 이러한 상업도시의 발흥은 한 마디로 말하면 화폐경제의 발흥을 의미한다. 이러한 화폐경제는 탐욕스러운 영리심---그칠 줄 모르는 이윤추구심이 인간 행동의 주요한 동기가 된다. 경제면에서 자유경쟁, 나아가서 약육강식의 시대의 도래이며, 가치기준이 화폐로 뒤바뀌고 사회의 중심세력이 귀족신분에서 부의 소유자=재물을 가진 실력자로 뒤바뀌는 사회변천의 시기의 도래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優位(우위)에 서는 자는 富를 소유한 시민이다. 그러나 시민은 단순한 부의 소유자만은 아니다. 그들의 영리심은 구시대와는 달리 합리성을 척도로 해서 추구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부와 理智(이지)가 결합되는 여지가 있다.

시민은 이성을 가지고 있는 부의 실력자일 때에 참으로 도시국가의 주역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적인 영리추구를 위한 경쟁----약육강식과 그 방법의 합리성=계산성은 정치에도 반영되어 어떻게 하면 가장 효과적으로 최대한의 이익을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냉철히 타산하는 정치성향을 초래하게 되었다 .마르틴(Alberti,Martin)은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국가 자체가 자본주의적 기업가로 화하고, 정치가도 계산가가 된다. 정책상의 고려나 결정은 경제적인 것에 의하여 좌우된다. 정치 전체가 그곳에서 계산적 사고를 중세국가가 아직까지 알지 못했던, 합리성의 새 정신을 터득한다.”고 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정치가의 냉혹할 정도의 타산성은 바로 이러한 데서 나오는 것이다. 국가이성(ratio Status)이란 말이 이 시대에 만들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당시의 군주나 귀족 또는 교항까지도 상인적 타산을 기지고 정치무대에서 냉혹한 약육강식의 당사자가 되었다. 교황 알렉산데르와 그의 사생아 보르지아의 예는 그 단적인 표현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상업적인 경제배경을 가지고 도시국가로 발전된 이탈리아는 국가통일이라는 문제에 있어서도 그 자체 모순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었다. 도시국가 단위의 분열.대립.항쟁의 악순환은 절대주의의 국가의 전체군주하의 통일을 이룬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하여 이탈리아의 통일국가의 완성이라는 과제를 앞에 놓고 하나의 약점이 되기도 하였다. 이탈리아의 정치적 분열은 소도시국가가 당면하는 불가피한 운명이기도 했다. 다만 르네상스의 문화발전이 이러한 정치적 분열에 힘입은 바가 크기는 하였지만,,,,,,.

 

 

 

-마키야벨리의 時代

 

 

 10세기초까지 활약한 이탈리아 피렌체에,제노바,베네치아 등의 도시국가와 교황령 및 밀라노,나폴리,페라라 등의 군주국이 서로 분열.대립하여 항쟁을 계속하던 시기이다. 당시의 실력자인 대상인은 도시국가를 배경으로 존속하는 자이기 때문에 도시국가의 테두리를 넘어선=민족 통일을 반대했다. 그 상인자신이 민족적 통일에는 큰 장애물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상인적 타산성은 목전의 편리에 사로잡혀서 用兵軍(용병군)을 대대적으로 채용했다. 이것은 마키야벨리가 군주론에서 누누이 지적하고 있는 봐와 같이 이탈리아의 정치에 있어서 군주의 몰락과 도시국가의 멸망의 큰 원인이 되었다.

한편 북유럽에서는 이탈리아와는 달리 이미 통일적인 중앙집권적국가(絶對主義國家)가 발달하여 이탈리아를 위협하고 있었다. 1494년 프랑스의 대군이 피렌체에 침입했고, 계속해서 독일,프랑스,스페인 등의 국가도 분열된 이탈리아에 침입하였다.

프랑스의 침입은 받은 마키야벨리의 조국 피렌체에는 메디치가의 몰락 후에도 계급분열.계급투쟁이 계속되고 눈앞의 이익을 가지고 다투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무엇보다 국가=민족 통일의 과업을 이루기 위해서 용병군을 폐지하고 내정 및 외교를 혁신할 지도자가 나와야 할 때 였다. 마키야벨리는 이탈리아가 이러한 위기에 처한 시기에 정계의 일각에 등장했다. 그가 피렌체에 공화국의 서기가 된때는 1498년이였다. 이로부터 그의 피나는 노력이 추방당할때까지 계속되고 추방당한 후에도 저술을 통한 이론적 노력으로 이 과제를 위한 노력이 계속 되었지만, 이탈리아가 통일된 것은 그로부터 3백 수십년이 지난 후였다. 마키야벨 리가 소원한 국력을 결집해서 통일을 실현할 인물이 출현하여 그의 경륜을 펴 주는 행운을 보지는 못했던 것이다.

 

 

3. 마키야벨리의 生涯와 著書

 

 

-마키야벨리의 생애

 

 

1. 출생당시의 환경

 

 마키야벨리는 피렌체에에서 태어났으며 또 거기서 생애를 마친 사람이다. 그는 누구보다 자기가 난 곳을 사랑했다. 그이 애국심은 피렌체에 대한 애국심이고, 또 이탈리아에 대한 애국심도 피렌체에 대한 애국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피렌체에는 이탈리아에서는 다른 도시에 앞선 공업도시였고 또한 金融都市(금융도시)로서 번성했다. 피렌체에는 이탈리아에서 그 공업적.금융적 富를 배경으로 15세기에 번성한 도시국가였다. 그런데 마키야벨리가 난 것은 로렌초.데.메디치家가 번성이 절정에 달한 때였으나 1492년 로렌초가 사망한 후에 그의 아들 피에로(Piero de Medici,1471~1503)가 즉위한 후에는 쇠퇴의 징조가 나타나고 있었다.

마키야벨리는 1469년 5월 3일, 법률가인 베르나드로.디 니콜로.마키야벨리(Bernardo di Niccolo,Machiavelli, 1428~1500)을 아버지로, 바르톨로메아(Bartolomea)를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다. 마키야벨리가 장남이고 그 아래 아우 한 사람과 누이동생 둘이 있었다. 마키야벨리의 집안은 皇帝黨(황제당)에 속하는 오래 된 집안으로서 그 이름이 일찍부터 피렌체에의 역사에 나오고 있다. 그러나 큰 집안은 못되었던 모양이다. 마키야벨리의 아버지는 아네와 네 명의 형제 자매를 양육하기 위해 검소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한다. 마키야벨리의 아버지는 두드러진 인물이 되어서 세상에 알려진 사람은 아니었으나, 키케로나 그 밖의 고대의 고전을 수집할 정도의 교양은 있었다. 이러한 환경이 마키야벨리의 어머니의 詩才(시재)와 함께 마키야벨리에게 영향을 미쳤다. 마키야벨리는 소년시절부터 라틴어와 희랍어를 학습했으나 희랍어는 능통하지 못했다. 마이네케의 말을 빌면 “그는 르네상스 운동의 모든 내용을 섭취한 것은 아니였다. 그 宗敎的欲求(종교적욕구) 및 思辨的(사변적)=哲學的欲求(철학적욕구)를 다 가지지도 않았고, 또 르네상스의 예술적 정신에 의하여 무의식적으로 飽和(포화)되어, 한편으로는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르네상스의 예술적 노력을 각별히 높이 평가하지도 않았다.” 그가 이처럼 당시의 예술에 크게 감명을 받지 않았던 것은 예술가이기 보다 정치에 한층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로렌초가 주위를 제압하고 승리에 빛나던 것이 그의 관심을 끌었다. 로렌초가 사망한 것은 마키야벨리가 23세일 때였는데 이로부터 피렌체에는 계속해서 재난을 겪는 길을 걷게 되었다.

 

 

2. 관리로서의 마키야벨리

 

 마키야벨리가 피렌체에의 정계에 관리로서 지위를 가지기 전에 그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정치의 실체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 있었다. 즉 로렌초의 번영, 피에로의 추방, 사보나롤라의 등장과 몰락이라는 정치변동이 그것이다. 특히 사보나롤라라는 성직자가 1494년 샤를8세의 프랑스 침입에 굴한 피에르를 민중이 추방한 뒤를 이어 지도자로서 공화정을 부활시켜 4년 집권한 끝에 火刑(화형)에 처험을 당한 일은 마키야벨리가 일생을 두고 정치의 교훈으로 삼은 사건이다. 사보나롤라는 성직자로서 정치계에서 神權政治(신권정치)를 폈으나 반대파의 모략과 교황의 파문으로 몰락되었는데 그는 사보나롤라의 몰락을 武力이 없는 예언자의 末路(말로)라고 보았다. 그는 군주론에서 무장한 예언자는 승리를 하지만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는 멸망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정치의 현실은 있는 그대로 파헤치는 이른봐 눈에 튀었다고나 할까,,,,,.

사보나롤라가 처형당한 후에 피에로 소데리니가 피렌체에의 공화정의 수령이 되고, 여기서 마키야벨리가 정계에 등장하는 기회가 온다. 그는 사보나롤라가 순교당한지(1598,5,23) 얼마 안되는 1498년 5월 28일 피렌체에의 政廳(정청)에 들어가 第2書記局의 서기가 된다. 당시 그는 29세였다.

마키야벨리가 피렌체에의 공화정부에 취직하게 된 것은 그의 선배인 마르첼레오.비르질리오(Marcelleo.Virgilio, 1464~1521)의 추천에 의한 것이였다. 피렌체에의 공화정부는 시노리아(中央政廳)가 모든 정무를 담당하는데, 여기에는 네 개의 사무국이 있었다. 마르첼레오.비르질리오는 제1사무국의 국장이며 마키야벨리의 오랜 친구였다. 그의 추천으로 마키야벨리는 제2사무국의 국장으로 승진했다. 이때부터 그는 외국에 사신을 파견하거나 다른 도시와 조약을 체결하며, 외교절충을 하는가하면 軍事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는 10인회(十人會)에 출석하여 議定書(의정서)나 指令(지령)의 초안을 잡고, 스스로 외교사절로서 대외적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공화정부의 외교 및 군사에 관한 중요한 실무를 직접 담당하였다. 마키야벨리 자신은 이러한 실무를 담당하면서도 적극적인 정치가로서 갖추어야 할 권력으지나 투쟁본능은 없고 오히려 예민하고 활동적인 관찰자로서 지냈다.

마키야벨리는 29세에 공화정의 관리가 된 다음 14년 후인 1512년 9월에 메디치가가 복권하여 소데리니 정권이 타도되기까지 그 지위에 충실했다. 소데리니정권이 타도되자 그는 직위를 상실하고 失職(실직)생활을 하게 되었다.

 

 

3. 메디치의 집권과 마키야벨리의 추방

 

 마키야벨리가 실제로 정치계의 일선에서 활약하면서 정치가의 理想(이상)에 가깝다고 본 인물은 군주론에서 자주 언급되는 교황 알랙산대르의 사생아 체자레.보르지아였다. 그는 냉혹.무자비한 야심가로서 도덕적인 배려나 신의는 전혀 개의치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마키야벨리는 그를 그야말로 군주의 典型(전형)이라고 보았다. 또 마키야벨리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정계생활에서 느낀 것은 귀족보다 민중을 자기편에 두고, 용병이나 외국의 원군보단 국민군=민병을 창설.육성해서 이들을 나라의 방패로 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1905년 피사 전선에서 피렌체에의 군대가 패배하자 마키여벨리의 열정적인 권고를 받아들여 피렌체에의 정청은 민병제를 실시하게 된다. 이 민병제란 일반시민을 무장시켜 휴가를 이용해서 군사훈련을 해 두어 유사시에 대비하는 제도인데, 이것도 귀족과 일부 대시민(大市民)의 반대로 좌절되었으나, 다시 1506년에 국민군을 창설해 징병문제 담당관으로 활약한다.

그런데 1517년 8월 에스파니아의 장군 라몬.카르도나가 피렌체에의 전초지 프라도에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하게 된다. 이때에 이에 대항한 피렌체에의 국민군은 대포소리가 들리자 그만 전의를 상실해서 패주한다. 국민군은 도시의 빈민이나 농민으로 구성되어 훈련도 부족하고 애국심도 없었기 때문에 마키야벨리의 오랫동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비참하게 끝났다. 이 때문에 피렌체에 있는 메디치 파는 폭동을 일으켜서 9월 1일 소데리니는 망명하고 줄리아노.데 메디치는 정복자로서 귀환하여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메디치가 정권을 장악 한지 두 달후인 11월 7일 마키야벨리는 면직당하고 피렌체에의 영내에서 禁足(금족)처분을 당했다. 여기에다 그 이듬해에는 메디치 반대의 음모에 가담했다는 협의를 받고 스탱케 감옥에 투옥당했다가 4월 교황 레오10세의 즉위에 의한 大赦令(대사령)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피렌체에는 머무를 수 없게 되어 시의 근교 산판도레아.인페루굿시나의 산장에 살게 된다. 이러한 산장에 갇힌 實意(실의)의 생활에서 군주론,정략론 등의 그의 저술이 나오게 된다.

추방후 15년간은 내면적으로는 걸작을 써서 후세에 남기는 결실의 시기라고 할수 있으나, 외면적으로는 몰락한 실직자의 쓸쓸한 생활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그에게 만년에 이르러 한 줄기 광명이 비치는 듯하였다. 1517년에 피렌체에의 어느 회사의 일을 맡아서 제네바에 갔고, 1520년에는 商用(상용)으로 록카에 가기도 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1520년 樞機官(추기관) 줄리오.데.메디치(Giulio.de.Medici, 1478~1534)가 그에게 피렌체에의 역사집필을 위촉한 것이었다. 마키야벨리는 이 필생의 대저작을 1515년에 완성하여 클라멘스에게 받첬다. 이리하여 그는 메디치파에 채용될 기회가 열리는 듯한 때에 1527년 5월에 메디치의 반대세력이 정권을 탈취하고 말았다. 그의 한 줄기 희망도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 해 6월 22일 마키야벨리는 병을 얻어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마키야벨리의 著作

 

1. 君主論(군주론)

 

 마키야벨리저작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군주론”과 “정략론(로마사론)”이다. 군주론은 권력의 운전자로서의 군주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에 구애되지 않는 타산가로서 어떻게 처신하여야 하는가를 피렌체에를 비롯한 당시의 정치상황과 과거의 사실을 들어서 논한 것이다. 한편 정략론은 고대의 로마공화정을 신봉한 마키야벨리가 고대적인 “덕(德 )”의 부활을 열열히 갈망한데서 씌어진 것이다.

먼저 여기서는 군주론이 집필된 경위를 보자. 마키야벨리가 본격적인 저술활동을 개시한 것은 그가 정계에서 추방당한 후 즉 1512년 이후이다. 군주론은 그 책의 獻辭(헌사)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가 정계에서 오랜 체험과 끊임없는 관찰에 입각하여 정치권력의 획득 및 유지를 논한 것이다. 이 군주론의 집필 시기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1513년 여름이라고 추측된다. 그것은 그가 빗텔리에게 보낸 편지에서“.....단테가 이미 말했듯이 배운 것을 정리하지 않으면 학문의 길은 없다고 합니다. 나는 이 사람들과 말했던 것을 정리해서 여기 군주론이라는 하나의 작은 책을 만들었습니다. 국가의 성질, 그 종류, 획득의 방법, 유지의 방법, 상실의 이유를 論究(논구)하여, 이 문제에 관해서 가능한 한 깊이 따져 보았습니다.”

이렇게 1513년 여름에 완성한 군주론의 원고를 친구에게 회람시키고 인쇄하여 출판하려는 데까지는 손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당초에 군주론을 집필한 동기는 大로렌초의 아드로서 피렌체에의 지배자였던 줄리아노.데.메디치에게 바치려는 데 있었으나, 줄리아노는 1516년에 36세로 사망했다. 그래서 예정을 바꾸어서 마키야벨리가 바치려고 한 인물은 우루비노공(公)로렌초이다. 그러나 그것도 실현되지 못한 채 마키야벨리는 사망하고, 군주론이 출간된 것은 그가 사망한 후인 1532년이다. 그가 사망한 후 5년이 되어서 비로서 “군주론”은 햇빛을 본 것이다.

 

 

2. “정략론”(로마사론)

 

 정략론은 “로마사론”으로도 알려진 책이데 원제목은“티토.리비오의初篇(초편)10장에 입각한 논고(Discorsi Sopra la Prima 야 Tito Livio)"이다.

이 책은 1513년경에 착수되어 17년에 완성되었다.“리비우스(Livius, B.C59~A.D17)”는 로마 굴지의 역사가로서 140권의 로마사를 썼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유실되어 전하지 아니하고 제1권에서 제10권까지와, 제21권에서 제45권까지 및 제91권이 남아 있다. 마키야벨리는 초편 10권을 제재로 하여 이에 주해를 한 것이 “정략론”이다. 이 책에서는 국가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보다 유효한 정체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 문제의 중심이 되어 있다. 그는 政體(정체)를 군주정,귀족정,민중정 등 세 개로 분류하고, 이것이 타락되면 僭主政(참주정),寡頭政(과두정),衆愚政(중우정)등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가장 이상적인 정체는 먼저번의 삼자가 혼합된 공화정이라고 한다. 일종의 혼합정체론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그는 군주론에서 처럼 강력한 군주의 출현을 기대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그의 문제의식은 당시의 혼란된 정국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의 정책인가를 모색한 것으로서 피렌체에의 지식인의 요구를 배경으로 해서 집필한 것이다. 이 정략론도 군주론과 마찬가지로 그의 생존시에는 추간되지 못하고 그의 사망후 4년이 지난 1531년에 겨우 출간됬다.

 

 

3. 피렌체사 및 기타

 

 마키야벨리가 “정략론”을 바친 사람은 메디치 집안의 한 사람인 고시모.롯첼라이 였는데, 고시모는 피렌체에의 지식인 그룹의 중심인물이였다. 마키야벨리는 이들과 접촉하면서, 특히 고시모회의 교제에서 받은 자극으로“전술론(Arte della Guerra)을 집필했다. 그는 정계에 있을 때부터 군제개혁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었다. 국가 권력의 유지에는 군제개혁이 가장 급한 과제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정치와 전술은 서로 뗄 수 없는 것이고, 정치가가 무력의 뒷받침을 받을 때에 비로서 정치적 목적이 달성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통감한 것이 그였다. 이 전술론은 16세기에 군사와 전술에 관한 것으로서는 일급의 저술이라고 한다. 고대 로마의 군제, 전술,축성법 등에 이르기까지 주도면밀하게 논한 것이 이 책이다. 다행이도 이 책은 마키야벨리가 생존하던 1521년에 출간되었다.

 

마키야벨리에게는 이론적.학문적 저술 이외에도 문학작품이 적지 않다.1520년 7월부터 9월에 이르기까지 록카에 있는 동안에 “카스트루치오.카스트라카니전(Vita di Castruccio Castracani)”을 집필해서 차노비 본델몬디에게 바쳤다. 가공의 영걸로서 천애고아인 자가 천하의 용맹을 떨친다는 전기풍의 소설이다. 그리고 그는 희극“만드라고라(Mandragora)"를 비롯한 여러 작품을 썼다. 특히”만드라고라“라는 어느 아내의 간통 이야기로서 당시의 풍속을 예리하게 파헤친 희극이다. 이 희극은 1526년에 상연하여 크게 성공했다고 한다.

마키야벨리의 필생의 대작은“피렌체사(Storie Fiorentine”)이다. 마키야벨리는 고시모, 줄리오 등 피렌체가의 유력자와 교제를 하게 되었는데 1520년 줄리오의 위촉을 받아서 이에 착수 한다. 이 저술은 1525년 봄에 8권을 탈고해서 줄리오에게 바쳤다. 이 책의 내용은 피렌체에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흥망사이다. 당시의 이탈리아 사가들보다 시야가 넓은 당당한 역사서로서 휴머니즘적 역사서술의 걸작품이다.

 

 

4. 마키야벨리의 思想

 

 

-일관된 問題意識(문제의식)

 

 

 마키야벨리가 정계에 있을때나 정계에서 추방당해서 야인으로 있을때나 항상 염두에 두고 행동과 사색 및 저술을 통해서 추구한 목적은 주위의 강대국의 농락을 당하면서 분열 대립하여 상쟁하는 이탈리아를 통일된 강력한 국가로 하는 것이였다. 16세기라는 르네상스의 문화풍토 속에서 자란 그는 당시의 정치나 문화에 깊이 영향을 받은 사상가였다. 한편에서는 전통적인 인문주위에 의한 교육과 지적 분위기에서 지성을 닦고, 다른 한편으로는 격동하는 사회와 정치의 적나라한 현실에서 사상을 형성하였다. 그의 저술이 희곡 같은 문학작품 이외에는 모두가 하나의 의도를 가지고 씌어졌음을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조카가 아저씨를 살해하고 어제의 친구가 오늘 웃으면서 독살하는 권력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 하면 이탈리아가 통일된 강력한 국가로서 자립할수 있는가 하는 것을 모색했다. 특히 그는 정치를 있는 그대로“리얼리스틱”하게 파악했기 때문에 그의 문제제기나 문제해결을 위한 제언이 이를 반영하여 후세에 크니큰 오해를 초래하게 될 씨를 뿌렸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는 당시로서는 정치현상에 대한 이해와 정치발전에 대한 이론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사상가였다고 할 수 있다.

 

 

-마키야벨리의 獨創性(독창성)

 

 

 정치에 대한 관찰이나 정계에서 체험한 정치관은 힘이라고 본것이다. 군주론이나 정략론에서 강조하고 있는것은 힘이요, 무력이며, 이 힘=무력을 적절히 교묘하게 구사하여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하는 권력자의 능력이였다. 이것을 사자의 폭력과 여우의 교활이라는 말로서 간략하게 그는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는 르네상스라는 상인의 합리적 타산=계산의 치밀성이 통하는 문화풍토에서의 영향이 있다. 정치적 실천을 도덕적.윤리적 명분의 굴레에 얽매여서 행동반경을 축소하는 일이 없는 대담성,모험성,계산성이라는 합리성의 사고가 흐르고 있다. 그는 인간의 본성과 형태를 냉정히 관찰해서 얻는 결론에 따라서 인간성이 대개 같고 그 인간성은 이기적 성격이라는 관점에서 모든 인간의 행동은 예측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어떤 점에서는 인간에 대한 철저한 불신감에 입각하고 있다. 마키야벨리에 의하면 자기아버지가 살해당한 것을 쉽게 잊어버려도 자기의 재산이 박탈당하거나 자기 아내가 겁탈당한 것은 평생두고 잊을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이란,“...사악한 존재로서 제약이 없으면 타고난 사악한 성격이 발휘되려고 한다. 그 사악함이 밖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슨 이유가 있기 때문이므로 진리의 아버지라고 할 시간이 그 정체를 폭로해 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착한 일을 하는것도 대개는 그럴만한 이유 때문에 그러는 것이지 마음이 착해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러니 권력을 둘려싼 정치의 싸움에서 신의나 도덕이란 애당초 구애받을 것이 못된다. “현명한 군주란 신의를 지키는 것이 불리한거나, 약속할 때의 조건이 없어진 경우에는 신의를 지킬 수는 없고 또 지킬 필요도 없다.” 체자레.보르지아 같은 패덕한이 정치적으로 높이 평가되는 것도 바로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특히 그는 상인 세계에서의 합리성,인문주의가 가지는 이성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정치계에 있어서는 이성보다 결단력과 의지력이 이성에 앞서는 자질이다. 결단성 있게 실천하는 용기가 주저하는 신중성보다 정치세계에서는 필요하다. 이와 같은 마키야벨리의 정치관은 도덕.윤리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과 같이 보인다. 사실 정통적인 정치관으로서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나, 우리가 분명히 해 두어야할 것은 인간에게서 정치가 시작된 이래 그것이 아무리 도덕적 명분으로 장식되어 왔다고 할지라도, 정치의 실천은 그렇지 않았고, 마키야벨리는 바로 그것을 대담하게 公言한 것이다. 마키야벨리의 위대성이나 비난받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한다. 정치가 범죄의 시작이라는 것을 가장 대담하게 시인한 것이 마키야벨리라고 할까?

 

 

-政治와 道德의 분리

 

 

 정치가의 이상은 도덕적 명분이나 기대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인간의 약점을 조정하고 자기의 목적을 위해서 정력적으로 대담히 밀고 나아가는 권력의지와 행동력이였다. 정치의 세계와 도덕의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나아가서는 경제가 정치를 좌우한다는 의식에도 반발했다. 정치의 독자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의식한 사상가였다. 도덕철학으로부터 정치과학을 독립시킨 사상가이기도 하다. 정치가=군주는 신하들로부터 사랑받기보다는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고 위선을 서슴치 않아야 한다고 한것이나, 또는 잔인하여야 한다고 역설한것은 정치란 세계를 누구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정치에 있어서는 동기보다는 결과가 중요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체험을 통해서 통감한 것이라고 할까? 그는 “파렴치한 것이라도, 그 결과로 생기는 위험이라도, 큰 일을 해 놓고 보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것은 정치의 세계에 있어서 한 사람의 권력자의 판단이 국가와 국민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깊이 인식한 사람의 말이 아닐 수 없다.

 

 

-德(Virtus)과 幸運(Furtuna)

 

 

 마키야벨리는 정계의 일선에서 이탈리아 정치의 혼란을 보고 느낀 것은 정치제도도 중요하지만 이 제도를 움직이는 정신에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 정신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덕이다. Virtus란 우리가 도덕적 견지에서 말하는 덕이 아니라, 인간에게 큰 사업을 이루게 할 수 있는 인간의 근본적 성격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행동이 거기에서 일어나는 힘과 활력을 말한다. 그것은 지혜나 이성이기보다는 집중된 의지력, 안으로부터 용솟음치는, 구실을 개의치 않는 통찰력이다. 국가의 지도자라면 이 덕이 있어야 한다. 이 덕은 개인도 갖지만 집단에도 있다.

다음에 그는 정치적 성공에 행운을 결부 시키고 있다. 이것은 운명이 아니라 당시의 정치적 상황, 인간의 행위를 제약하는 자연적 환경이다. 어떤 기질은 어느 환경에서는 좌절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행운은 숙명이 아니다. 왜냐면 “운명은 변화 하는 것이다. 자기가 하는 방식을 고집하는 인간은 그 방식이 운명과 일치할 때에는 성공하지만 일치 하지 않을 때에는 실패한다.

나로서는 조심성스러운 것보다는 결단해서 단행해야 한다고 본다. 왜냐면 운명의 신은 여신이기 때문이다. 운명의 여신은 유순한 사람보다 거친 사람에게 순종한다.”따라서 시대의 변천에 적절히 적응하면서 대담히 나가야 한다. 자연이 인간에게 준 능력을 활용하는 한 인간은 외부의 압력에 직면해서도 희망이 있다. 이처럼 닥친 사태를 통제하는 기회는 짦은 순간에만 덕은 관찰하고 선택 및 결단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마키야벨리의 정치론은 구래의 원리로써 해결하지 못했던 이탈리아의 정치 현상을 타파하려는 몸부림이였고, 애국적 정열과 성실의 이론적 집약의 결실이기도 했다. 그는 종래의 낡은 관념의 장벽을 부수고, 한 걸음 나아가서 이탈리아의 통일된 강력한 국가의 건설이라는 이상을구현하려고 한 위대한 사상가이고, 또 실패한 불운의 관리이기도 했다.

 

 

5. 마키야벨리즘의 問題

 

 

-칼리클레스와 韓非子(한비자)

 

 

 정치에 있어서 권모술수를 솔직하게 긍정한 것은 마키야벨리가 처음은 아니다. 그는 근대에 있어서 대담히 그 실천을 당시의 이탈리아 정국의 타개책으로 제안했을 뿐이다. 플라톤의“고르기아스”에서 궤변론자 칼리클레스(Kalli.Kles)는 정의의 관념을 부정하면서“뛰어난 자는 뒤떨어진 자 보다도, 유능한 자는 무능한 자 보다도 많이 가지는 것이 옳다. 정의란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고 강자는 약자보다 많이 가지는 방식으로 판정되어 왔다.”고 했다. 한비자도 군주가 신하를 다스리는 기술로서 법(法=形)과 술(術=德)을 내세우고, 인간조정=권력조정의 권모술을 전개했었다.

그뿐만 아니라 실제의 권력정치의 현실을 일면이라도 엿본 자는 누구도 마키야벨리가 그릇된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고만 꼬집을 수 없을 것이다. 그의 悲願(비원)은 이탈리아가 통일되고 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강력한 국가가 되는 것이였다. 이것이 당시의 권력정치에서는 도저히 착한 마음이나 의도만을 가지고서는 이루어질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권모술수를 치(治)자에게 솔직히 제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새로운 문제의 提起(제기)

 

 

 마키야벨리즘이 그 정체를 남김 없이 드러내는 것은 국제정치에 있어서이다. 국제정치의 이면은 문제 그대로“윤리적인 제약을 무시한 적나라한 권력정치적인 행동양식”이다. 이것이 국가의 주권성을 명분으로 자행되고 현대의 정치기술로써도 그 장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은 우리시대의 불행이기도 하다. 특히 분단국가인 우리,,,,

그 밖에 이 마키야벨리즘은 과거에는 나찌즘.군국주의와 야합이 되어 권력정치의 횡포와 부정을 변호하는 방패로서도 구실을 했다. 그런데 이에 그치지않고 현대정치에 있어서도 고도로 발전된 테크롤로지를 이용.악용하여 민중조정.기만.회유의 기술로서 타락 되고 있다는점 이다.

오늘날 발전된 전쟁기술, 통신기관, 교통기관은 국가권력의 위력을 일찍이 볼 수 없던 정도까지 발휘하게 하는데, 여기서 마키야벨리즘이 그대로 긍정될 때에는 소수의 권력장악자가 만능의 존재로 화하게 되고 인간 모멸의 풍조를 공연화시킬 위험이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정치는 소군주, 소국가 사이의 분쟁이었고 전쟁도 소규모적인 용병군의 충돌이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국제정치는 전자기기와 원자력을 동원하는 대량살육의 기계전쟁 직전의 갈등이다. 여기서 마키야벨리즘의 안이한 긍정이 권력정치에 크나큰 비극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

 

 

-마키야벨리즘의 評價

 

 

 우리는 정치현상을 이상으로보거나, 또는 이상의 현실적기반의 결여를 들어 권력정치의 실제에만 집착하거나 하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태도를 삼가 해야 한다. 카르(E.H.Carr)가 말하듯이 건전한 정치사상과 건전한 정치행동은 유토피아와 리얼리티가 함께 공존하는 곳에서 볼 수 있다. 정치를 만사에 있어서 도덕으로만 하는 것은 비현실적이지만, 정치가 도의를 함부로 유린 하는것도 잘못이다. 정치적 행동이 이기적.권력의지적,투쟁적인 것이지만, 권력이 도의적 권위를 무시하 때도 여기에는 큰 과오가 있게 마련이다. 힘의 세계인 정치에 있어서도 이상과 사명이 있기 때문에 권력이 필요악으로서 용인되는 것이다. 현실정치의 소용돌이속에서 정권경쟁=정치투쟁에 어느 정도“룰”을 설정하는 데 성공한 것은 민주주의 이다. 그러나 이것은 국내정치에 한한 것이고 국제정치에 있어서는 국가이성과 힘이 지배한다. 이러한 힘이 지배하고 권모술수가 횡행하는 것을 아주 극복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여기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계란“힘이 정의”가 아니라“정의가 힘”이 되는 세계이고 인간의 선의가 존중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6. “군주론”내용

 

 

-헌사

-군주국에는 어떠한 종류가 있는가? 또 그것은 어떠한 수단에 의하여 획득되는가?

-세습의 군주국에 대하여

-복합형의 군주국에 대하여

-알렉산더가 영유한 다리우스 왕국에는 알렉산더 사망 후 왜 대왕의 후계자에 대한 모반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점령되기 이전에 시민의 자치제를 실현했던 도시나 국가는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자기의 무력과 역량에 의하여 손에 넣은 새 군주국에 대하여

-다른 사람의 무력 또는 운에 의해서 장악한 새 군주국에 대하여

-그릇된 수단으로 군주의 지위를 차지한 사람들에 대하여

-시민형의 군주국에 대하여

-군주국의 국력은 어떻게 평가하면 좋은가?

-교회국가에 대하여

-군대의 종류와 용병군에 대하여

-외국원군,혼성군,자국군에 대하여

-군비에 관한 군주의 임무에 대하여

-인간 특히 군주는 무엇이 원인이 되어 칭찬받고 또는 비난당하는가?

-관대함과 인색에 대하여

-잔혹성과 인정있는 것에 대하여, 또는 사랑을 받는 것과 두려움을 당하는 것 중의 어느 것이 좋은가?

-군주는 어떻게 신의를 지켜야 하는가?

-경멸당하고 미움받는 것을 피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은가?

-군주들이 쌓은 성벽이나 그와 같은 것들은 유익한가 무익한가?

-존경을 받으려면 군주는 어떻게 행동하여야 하는가?

-군주가 측근으로 기용하는 비서관에 대하여

-추종자들을 어떻게 해서 피해야 할 것인가?

-이탈리아의 군주들은 어떤 이유로 영지를 잃었는가?

-운명은 인간의 활동에 어느 정도로 영향을 미치는가? 또 운명에는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이탈리아를 야만족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권고

 

 

위와 같은 논제에 대하여 마키야벨리는 역사적 사실과 그가 경험한 현실을 세밀히 관찰한 사실을 들어 상세하게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방법을 제시한다.

오늘날에 각자 처한 위치에서 참고해 볼만 하다. 단, 선과 정의가 악에 제압당해 해어나지 못하는 고통 받는 자라면 상대를 알고 적용해 볼만도,,,,,조심스럽게,,,,,,,,,,,만약 그대가 악인이라면????!!!!,,.........,

 

 

여기서는 운명에의 노예가 된 이들을 위해, 마지막 부분 -운명은 인간의 활동에 어느 정도로 영향을 미치는가? 또 운명에는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마키야벨리에게 들어본다.

 

“원래 이 세상의 일이란 운명과 神의 지배에 맡겨져 있는 것으로서 인간이 아무리 고심해도 세상의 진로를 뒤바꿀 수는 없다. 아니 대책조차 세울 수가 없다, 라고 말한다. 이러한 말들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해 왔고 말해 왔다는 것을 결코 모르고 있는 바는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들의 의견에 의하면 어떤일을 하는데도 너무 땀을 흘리며 괴롭게 일할 것은 없고, 숙명대로 몸을 맡기는 것이 좋다는 것이 된다. 특히 현대에는 인간의 생각이 거의 미치지 않는 세상의 격변을 매일 보게 되기 때문에 이러한 견해가 다시 받아 들여 진다. 그리고 이 사실에 생각이 미칠 때에는 나도 그들의 의견에 기울어진다.

그러나 우리들 인간은 자유로운 의욕(Libero aribitrio. 중세철학에서 잘 쓰는 자유의사라는 말인데, 마키야벨리는 이것을 행동의욕이라는 의미로 쓰고 있다. 따라서 이성적인 선악의 판단력이라는 원래의 의미와는 아주 다르다)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나는 용의주도하기보다 과단성 있게 나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운명의 신은 여신(女神)이기 때문에 그 여자를 정복하려고 하면 때려눕히든지 차버리는 것이 필요하다. 운명은 냉정한 처신을 하는 자 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순종한다. 요컨대 운명은 여성을 닮아서 젊은이의 벗이다. 결국 젊은이의 생각은 깊지 못하고 난폭하지만 지극히 여자를 지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