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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우물골옹달샘
癡愚의狂氣를 풍자하고 토머스.모어의 정신을 극찬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 본문
1. 에라스무스와 그의 時代
윌리엄.오컴(W.Occam)의 ‘면도날’에 의하여 불필요한 實體의 延長이 절단되고, 스콜라철학의 巨木이 그 밑뿌리부터 동요되면서 르네상스의 거센 물결이 유럽 대륙을 휩쓸고 있을 즈음에,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1466~1536)는 ‘人文主義者,Humanist)의 왕’으로서 이 시기에 많은 문제의식을 제기함과 아울러 깊은 영향을 끼쳐 왔었다.
그는 네덜란드 출신의 신부인 동시에 신학자이었으나, 그의 예리한 直觀力과 심오한 사고는 그의 시대가 직면한 엄청난 변동에 침묵을 지킬수 없었고, 따라서 부조리하고 愚劣한 인간사회의 병폐를 신랄하게 諷刺(풍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라스무스는 당초 신학을 스콜라 철학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성서와 敎父들의 신앙을 연구하기 위하여 그리스 고전을 탐독하였으나, 영국과 이탈리아 각지를 왕래하며 파리등지를 편력하면서 인문주의의 물결에 휩쓸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에라스무스는 당시의 유럽 사회의 각계 계층의 인간을 그의 냉철한 안목으로 통찰하고, 인간이 얼마나 狂氣(광기)나 癡愚(치우)에 의하여 행동하기 쉬우며, 그 결과 어리석게도 불행의 수렁속으로 어떻게 빠져 들어가는가 하는 것을 “바보신”의 自慢談(자만담)을 통하여 그림으로써 통렬히 인간사회를 풍자하고 있다.
에라스무스가 풍자하지 않을 수 없었던 시대는, 바로 유럽 제국이 이른바 봉건제도로부터 탈피하여 각국의 왕권이 확립되어 가던 시기였으므로 제국가간에 중세 이래 오랜 세월 동안 권력의 玉座에 앉은체, 自己肅正을 소흘히 하여 왔던 교회(舊敎會)가 여러 가지 病弊(병폐)를 드러내기 시작하였으며, 그것이 곧 르네상스 문화에 의하여 배양된 비판정신의 표적이 된 시기이기도 하였다. 또한 각 도시의 발달이나 상공인의 진출 결과 소위 시민계급의 사회참여가 활발하게 된 시기이기도 하므로 종교사상문제나 계급문제가 지금까지는 없었던 色調를 띠게 되었다. 따라서 자기반성이 결여된 데서 생겨난 여러 가지 광기나 치우가 자기주장에만 執着하는 또 다른 광기나 어리석음을 낳게 되어 드디어는 대립 相爭함으로써 무고한 피를 값없이 흘리는 경우가 허다하게 되었다. 에라스무스가 痛感한 것은 이러한 종류의 광기나 치우의 妄動이었다. 따라서 인간으로 하여금 이러한 망동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한 悲願(비원)으로 쓰여진 것이 바로 “바보신 예찬”(癡愚神 禮讚)인 것이다.
또한 이 시기, 1517년에 마르틴.루터(Martin.Luther)가 공공연히 구교회에 대하여 도전을 선언함으로써, 종교개혁 운동의 파문이 온 유럽에 확대되면서 에라스무스도 구교회의 자기숙정이라는 점에서 이에 동조하기도 하였다. 에라스무스는 시종 구교회에 속하고 구교회의 성직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신교도들의 공격의 대상이 되었던 것, 즉 구교회의 제도, 기타 구교회의 부패.불합리성을 함께 공격하였다. 따라서 1524년부터 1526년 사이에 걸처 행하여진 마르틴.루터와의 논쟁(自由意志論(De libero arbitrio)대 奴婢意志論(De servo arbitrio)이 있기 전까지는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의 지도자인 마르틴.루터로부터 여러차래 협력을 요청 받았으며, 구교회의 몰이해한 사람들로부터 이단자시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논쟁에 의하여 명백히 反 루터의 태도를 밝힘으로써, 에라스무스는 루터파로부터 배반자라는 비난을 맹렬히 받게 되었으며, 다른 한편 그는 반루터의 기치를 분명히 하면서 계속 구교회의 병폐와 불합리성을 追及하였기 태문에 구교회측으로부터서도 더욱 공격을 받게 되었다.
교회의 참된 再建이라는 그의 眞意와는 달리, 에라스무스는 그의 死後 1558년에 교황 바울4세로부터 제1급 이단자로 단죄되었다.
2. 그의 思想의 低邊-人文主義(Humanism)
에라스무스는 당초 그리스 고전 연구를 통하여, 스콜라 철학의 독단성을 배격하고, 神學을 이로부터 해방시키고자 의도하였다. 이 목적을 위하여 그는 영국, 이탈리아 및 프랑스 등지를 여행 하였고, 그 결과 각지의 선구적 인문주의 사상가들을 접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그는 당시 유럽을 席卷하였던 인문주의의 입장에 동조하게 되었고, 드디어는 福音精神의 탐구와 聖書의 재검토를 통하여 그리스도교의 자기비판을 요구하고, 이어서 종래의 여러 가지 제도나 학예에도 비판을 가하여, 보다 피가 통하는(Humanior)제도나 학예를 맞이하고자 열망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바로 인문주의(Humanisme<litterae humaniores>)의 최초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인문주의자들에 대하여 후세의 프랑스 사학자 오귀스탱.르노데(Augusin.Renaudet)의 말을 빌면, 다음과 같다.
[그들(인문주의자)은 교황이 보다 정치적이 아니도록, 고위 성직자들이 보다 무관심하지 않토록, 修道士들이 보다 규칙 바르고 보다 탐욕적이 아니고, 보다 잘난척하지 않도록, 敎區의 성직자들이 보다 無敎養하지 않으며 보다 헌신적이도록, 신학이 福音 및 인간에 대하여 보다 무지 하지 않도록, 종교가 보다 성직자 만능주의가 아니고, 보다 틀(型)에 얽매인 것이 아니며, 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가까운 것이 되도록 바라는 것이다](Henri Hauser et Augustin Renaudet; Les de`buts de l`age moderne, 3e'ed., P.U.F.,1946, p. 235).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보다~이도록(plus)], 또는 [보다~하지 않도록(moe`ns)]이라는 어귀가 되풀이 되는 것을 보더라도, 인문주의 학자들이 얼마나 현실을 온건하게 개혁하려고 하였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반역을 선언하지도, 타도를 부르짖지도 아니하였으며, 다만 실현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최저한의 것만을 요구하였던 것을 암시적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실현가능하다고 생각되었던 최저한의 것조차 실현되지 아니하였으나, 구교회의 高位職에 있는 자들을 향하여 이러한 요구를 한 인문주의 학자들은 사실 [커다란 희망]에 불타 있었으며,“명괘한 대담성”을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초기 인문주의의 밝은 모습에서 에라스무스의 “바보신 예찬”이 탄생된 것이다.
3. 토마스.모어(Thomas.More)와의 交友
에라스무스의 사상의 발전, 특히 “바보신 예찬”의 저술에 결정적 영향을 미첬던 인물로 우리는 동시대의 영국의 인무주의 학자 토머스.모어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에라스무스가 토머스 모어를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1499년 여름, 영국의 귀족 일리엄.몽조이(William.Mountjoy)의 초청으로 渡英하였을 때이다. 이두 사람의 인문주의 학자는 곧 서로 意氣投合하여 그들의 우정과 함께 사상적으로 깊은 유대를 맺게 되었다. 따라서 에라스무스와 모어의 우정은 에라스무스의 “바보신 예찬”과 모어의“유토피아(Utopia)”가 연이어 출판되었던 시기의 전후가 가장 신선하고 친밀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에라스무스의 “바보신 예찬(Encomium Moriae, 1511)"은 1509년의 가을에 에라스무스가 런던의 토머스.모어가의 손님으로 머물면서 주객사이에 교환되었던 즐거운, 그러나 예리한 대화의 결실로 저술되어 토머스.모어에게 獻呈되었던 것이며, 모어의 "유토피아"는 1515년에 모어가 벨기에의 앤트어워프에 외교사절로 체재 중, 에라스무스에 의하여 소개 받은 페터.힐레스(Peter.Gilles)와의 대화에서 착상을 얻어 집필된 것으로 전하여지고 있다. 물론 그 동안에 에라스무스의 여러 가지 시사나 격려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며, "유토피아"의 草稿를 맨먼저 읽었던 것도 에라스무스였다.
이처럼 에라스무스와 모어사이의 깊은 우정에 의하여 “바보신 예찬”과 “유토피아”가 성립되었던 것도 중요한 사실이나, 또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바보신 예찬”과, “유토피아”사이에 상당한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다만 에라스무스와 모어의 성격상 차이가 거의 동일한 내용의 사실을 다른 구상에 의하여 발표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기실 에라스무스는 “유토피아”의 좋은 이해자로서, 이를 각국의 인문주의자의 학자들에게 추천 하였으며, 한편 모어는 “바보신”의 오해에 대한 둘도 없는 변호자였다.
모어는 에라스무스의 “바보신 예찬”에 대하여,“그것은, 무엇이 국가.사회에 있어서 불행의 원인인가 하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저술한 것이며, 따라서 그가 특히 착안하였던 것은 당시 유럽 사회의 각 계층의 인간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한편 에라스무스는 모어의 “유토피아”에 대하여,“모어가 유토피아”를 저술한 것은 무엇이 사회에 있어서 불행의 원인인가를 보여 주기 위한 것이며, 이 때 그가 특히 착안하였던 것은 그가 철저하게 연구하고 조사하여 온 영국의 體制이었다. 고 말하고 있다.(1519년 7월 23일자 Ulrich von Hutten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그러나 이러한 우정이 일시 냉각된 것은, 1517년에 마르틴.루터가 공공연히 구교회에 도전을 시작하여 소위 종교개혁운동의 파문이 유럽에 확대되면서 부터이었다. 종교개혁운동의 와중에 있어서 에라스무스와 모어는 구교회의 자기숙정이라는 점에서는 일치 하였으나, 신교의 개혁운동에 약간 상이한 견해를 가졌던 점에서 두 사람 사이의 정신적 교류에 암영이 비치기 시작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모어는 구교회 및 로마 교황의 권위에 절대 복종하는 태도로 일관하였으며, 소위 “이단”에 대하여서는 엄격한 태도를 취하였던대 반하여, 에라스무스는 시종 구교회에 속하며 구교회의 聖職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신교도들과 같이 구교회의 고투한 제도 및 부패상을 공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도 모어와 마찬가지로 교회의 분열을 극도로 반대하였으며, 이 두 사람은 모두 시종 구교회의 논객으로 활동하면서 교회의 통일과 숙정을 바랐었기 때문에 그들이 속하였던 교회의 제도에 예리한 비판을 가하였던 것이다.
4. 에라스무스의 主著들
그의 저작은 聖書校正(성서교정).註釋(주석)등을 중심으로 하는 신학적.문헌학적인 내용을 가진 저작들과, 계몽적.교화적인 목적을 가지고 저술된 저작들로 대별할 수 있다. 이들 저작들로부터 우리는 에라스무스의 인문주의 학자로서의 빛나는 학문적 업적을 찾아 볼수 있으나, 특히 후자의 경우는 에라스무스가 일개의 인간으로서 당시의 사회에 어떻게 대처하며, 어떻게 반응을 보였던가 하는 것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그 중 계몽적.교화적 저작으로서 특히 주목 할만 것은 “바보신 예찬”(癡愚神禮讚,Encomium Moriae,1511)과 “대화집”(對話集,Colloquia=Fammiliarium Colloquiorum Opus,1518~1533) 이외에 “격언집”“그리스도교도 병사제요” 및 “평화의 호소”등이 있다.
“격언집”은 그리스.라틴의 격언,속담 등을 수록하여 이것에 주석을 단 것이며, 고전학에 밝았던 에라스무스의 면모를 유감 없이 나타낸 것으로 1500년 이후 수차에 걸처 증판.증보되는 동안 그 내용도 팽대하여저서 그 후에 고전학 연구자들에게 귀중한 참고서가 되어 왔다. 또한 그리스.라틴의 고전에서 가려 뽑은 격언이나 속담을 집대성한 이 저서는 인간의 편벽이나 심리에 대하여 에라스무스가 많은 흥미와 깊은 통찰안을 가지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게 하여 준다.
“그리스도교도 병사제요”는 새로운 시대의 그리스도교 신자의 마음가짐을 說한 것으로서, 외면적인 의례를 지키는 것만으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몸에 간직할 수 없으며, 교양을 높이고 깊게 권유하고 있는 점에서 형식과 인습에 얽매어 있던 당시의 구교회의 제도나 신자의 태도에 비판을 가한 것이며 무지가 신앙의 기본이라고 생각하고 신자의 무지를 남용하는 경향이 있었던 일부의 성직자들을 경계한 것이기도 하다. “평화의 호소”는 시종일관하여 평화를 호소하고 전쟁을 고발하여 온 에라스무스의 여러 발언들을 하나로 집성한 것이며 “바보신 예찬”에서 “바보 여신”이 자기 자랑을 하는 형식과 같이 “평화의 신”이 간절한 호소를 엮어 나가는 구상에 따라서 서술이 전개 되고 있다. 유럽이 봉건제도에서 탈피하여 근대국가의 형성기에 접어들었던 15,16세기에 있어서는, 유럽 각국의 군주들이 그들의 세력확대에 광분하고 있었으므로 부단히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종교개혁이 확대되어 감에 따라 각국간의 싸움은 미묘,복잡하게 되어 갔다. 그 결과 같은 그리스도 교도가 같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서로를 살상하는 사태를 빚기에 이르렀다
에라스무스는 “백성은 도시를 건설하고 발전시켰으나 군주의 愚行이 이를 황폐하게 하였다.”고 영국의 동지 존.콜래트(John Colet)에게 서한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던 현실(1518년)에 직면 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그리스도 교도인 군주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잊고, 서로 싸우고 살상하는 우행을 언설을 다하여 깨우치고, 군주의 책임을 강하게 설파한 것이다. 이것은 1516년에 공표된 그리스도교 군주교육에서 볼 수 있는 悲願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 담겨져 있는 위기를 누구보다도 강하게 느끼고 있었던 에라스무스는 이를 시정하기 위한 길을 “비현실”이라고 비난하는 理想에서 구하는 도리 밖에 없었던 것이다. “평화의 호소”는 1525년에 파리 대학 신학부(소르본)에 의하여 고발되어 禁書處分을 받게 되었다.
5. 바보신 예찬 解題
가.“바보신 예찬”의 構成
바보신 예찬의 원제는 Encomium Moriae이지만, 바보신(Moriae)이 선정된 것은 에라스무스가 영국에 건너가서 친우 토머스.모어의 손님으로 체제하고 있을 때 일이다. 모어에 의하여 집필을 권유받고, 출판 할 것을 동시에 권유받은 “바보신 예찬”은 모어가 가장 두려워하고 唾棄(타기)하였던 “바보신(Moria)"을 예찬한다고 하는 역설적인 구상을 가지고 쓰여졌으며, 또한 모어에게 이를 헌정하고 있다. 거기에는 광명이 비치기 시작한 시대에 있어서의 에라스무스의 해학과, 에라스무스와 모어의 탁월한 인문주의 학자로서 밝은 대화를 느낄 수 있다. 기실 “바보신”을 예찬하는 것처럼 보이나 우리에게 제시되는 것은 “바보신”의 적이라고도할 총명, 냉철한 모어의, 또는 그의 정신의 예찬으로 되어 있다.
바보의 여신이 이 세상의 모든 쾌락과 행복은 자기의 힘으로 생겨난다고 하는 自慢談을 시발로하여, 사회 각 계층의 사람들(교황을 비롯한 교회의 권력자나 왕후귀족들도 포함하여)의 어리석은 또는 개탄할 행동은 모두 자기의 지휘에 의하여 생겨난다고 떠벌리고 있다. 그 속에는 무수한 성서의 인용구나 그리스.라틴의 고전에서 빌어온 여러 가지 글귀등으로 문장이 장식되어 있다. 이로 인하여 “바보신”의 발언에는 고의로 현학적인 웃음거리가 덧붙어져 있으며, 그 박식의 전개에 오히려 우리들이 당혹 할 경우도 없지 않으나, 이를 넘어서면 이 “바보신”의 자만담이야말로 인간의 어리석음과 광기에 대한 통렬한 풍자가 현명한 모어의 정신을 찬양하는 풍자가 깔려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전쟁에 광분하는 왕후귀족들, 현세의 권력에 연현하는 교회의 고위성직자들 입신출세를 위하여 곡학아세의 길을 용감히 걸어가는 신학자들에 대한 풍자가 전권을 통하여 가장 주요한 것으로 나타나 있으나, 바보의 여신에 이끌리는 대로 모든 대소의 癡行愚行을 저지르는 인간전체에 대한 비판의 배후에는 탁월한 인간 관찰자로서의 에라스무스의 안광이 빛나고 있는 듯하다.
“바보신”을 찬미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는, 실은“바보신”에 의하여 움직여지고 있는 인간들에게 풍자, 다시말하면 癡愚의적인 냉철한 모어의 정신에의 찬미가 이루어져 있으므로,“바보신”의 자만담속에 나오는 주역들은 기실 치우 때문에 狂氣에 사로잡힌 犧牲者에 불과 한 것이다. 따라서 “바보신”의 승리의 말은 진실로는 역설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런던 체재중 단숨에 쓰여진 이 “바보신 예찬”은 전권을 통하여 웃음을 금치못하는 명괘함이 넘치고 있으나, 전반과 후반의 서술법에 다소 상이한 점에 주목 하게 될 것이다. 즉 후반부에서는 에라스무스의 풍자가 보다 노골적으로 제시 되는 경우가 많으며, “바보신”의 말은 다소 현실감이 적은 듯이 생각되는 대문도 적지 않다. 이것은 결점이라면 결점이라고도 할수 있으나, 전체의 흐름의 문맥은 이러한 것을 무시하여도 좋을 만큼 열기에 넘처 있다고 하겠다.
나. “바보신 예찬”의 意義
본서중에 두가지 간단한 예문을 살펴보면, “나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도다체 누구의 도움으로 생명이 시작되는 것입니까?.....(엄격한 스토아 철학학자들도)아버지가 되고 싶을 때, 도움을 청하는 것은 바로 이나, 그렇습니다. 이 나입니다.````神들이나 인간은 도다체 어디서 태어나는 것입니까? 머리입니까, 얼굴, 또는 가슴입니까? 손이나 귀 따위의 휼륭한 기관에서 입니까?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인류를 번식케 하는 곳은 웃지 않고서는 그 이름을 댈수 없는, 실로 생각할 수도 없는 우수광스러운 별도의 기관인 것입니다.`````아이를 낳는데 얼마만한 위험이 따르는가, 또는 아이를 키우는 데 얼마만큼 고생을 하여야 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였드라면, 도다체 어떤 여인이 남자에게 시집을 가겠습니까?`````결혼할 마음을 갖게 하는 것도 나의 시녀의 輕躁無思慮(경조무사려)의 덕택인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나에게 얼마만한 은혜를 입고 있는가 하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이것은 “바보신예찬”의 비교적 첫부분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으로서, 인간사 중에 “바보신”의 힘이 작용하고 있음을 詭辯(궤변)에 가까운 冗談形式(용담형식)으로 표현 하고 있는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바보신”은, 예컨대 세상의 권력자들을 움직여서 세상에 갖가지 災禍를 불려이르키고, 결국은 자멸을 초래하는 바보를 지칭하기 위하여, 에라스무스는 통렬한 풍자를 “바보신”의 자만담에 의탁하고 있다. 전쟁은 바보, 광기에 의하여 이르켜지며, 수행되어지기 때문에 “바보신”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전쟁이야말로 가능한 모든 빛나는 무훈의 무대인것이며, 그 근원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결국은 彼我雙方이 모두 이득보다는 손해가 더 많은데도, 그 까닭을 잘 알 수 없는 동기에서 이러한 쟁투를 시작하는 것 이상을 바보짓이 또 있겠습니까?`````전쟁시에는 너무 무엇을 생각하지 말고 앞으로 돌진하여 가는 지방덩이 같은 인간이 더 필요한 것입니다.```` 이 고귀하고 더 없는 바보짓은 왕후나 여걸이나 도둑이나 강도나 무법자나 바보나 고리대금으로 머리가 잘 돌지 않는 인간, 요컨대 세상의 찌꺼기 같은 무리들이 일으키는 것으로서, 결코 등불을 켜고 밤에도 잠을 자지 아니하는 철학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입니다.”
“바보신예찬”은 이와 같이 생식을 추진하는 “바보신”과 같은 인간에 대한 해학적인 풍자와, 전쟁에 인간을 몰아내는“바보신”과 같은 인간의 광란 무사려에 대한 통렬한 풍자로 되어있다.
“바보신예찬”은 단순히 15~16세기의 유럽 사회에만 국한되는 현상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이러한 예는 수없이 있다는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그가 말한 바와 같이, “특정한 인물”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보나 광기에 움직이기 쉬운 인간성을 비판하고 있을 뿐이다. 한편 이러한 바보나 광기는 에라스무스의 시대 이후 현대까지도 우리의 주위에 쉽사리 찾아 볼 수 있는 현상이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에라스무스의 “바보신예찬”은 현대도 그 의의가 살아 있는 저작이라 할 수 있다.
6. “對話集” 解題
가.“대화집”의 構成
“바보신예찬”보다 먼저 1526년에 금서로 지정된 “대화집(Colloquia)”은 “바보신예찬”과 아울러 에라스무스의 예리하 인간관, 사회관을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명서인 것이다.
“대화집”의 초판은 1518년 11월 발간되었다. 당초는 150페이지 정도의 소책자였으나 그후 1533년 에라스무스 생전 최후의 판에 이르기까지 무려 87회의 판을 거듭하면서 증보.개정되었으며, 그 분량도 초판본의 몇 배가 되었다. 즉“광명의 시기”에서 “암흑의 시기‘에 걸처서 살아온 에라스무스의 예리한 인간관의 기록과 루터파와의 협력을 거부하면서도 루터파의 대두에 어느정도에서 도움을 준 원인이 되었던 구교회의 결함이나 불합리한 인습을 비판하여 온 기록들이 다량의 증보로 담겨지게 되었다.
본래 이 “대화집”은 1518년에 한 권으로 수록되기 이전부터 즉, 1496년 가을부터 1501년에 걸처서 에라스무스가 파리에 유학하고 있었을 때 이미 그 첫 싹이 트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즉 학자금을 얻기위하여 에라스무스는 “처음 만났을때의 인사나 방문시의 인사”, “작별인사”, “傳言(전언)”등 요컨대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라틴어의 문례집을 엮어서 이를 사용하여 라틴어의 개인교수를 하였던 것이다. 한편 당시의 그로서는 이를 활자화하려는 의도는 조금도 없었으며 그 후에도 이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에라스무스로부터 배운 제자의 한사람으로부터 수업시 사용하였던 노우트를 사들인 인문학자 배아투스.레나누스가 이를 무단으로 출판하여 버렸던 것이다.
“대화집”초판은 이러한 경로로 출판되었으나, 에라스무스의 원고가 아닌 그의 제자의 노우트에의한 것이므로 오류가 많았으며 또한 부적당한 문례나 표현이 뒤섞여 이었다. 에라스무스는 이러한 무단출판에 분개하여 이를 회수하려하였으나 이미 이 책자가 완전히 매진되어 그럴 수는 없었다. 에라스무스는 1519년 3월 하는 수 없이 개정판을 출간하였으며 이를 1522년2월 새로운 “대화집”증보 신판을 발간 하였다. 표제도 초판이래의 일상회화문례집(Familiarium Colloquiorum Formulae)의 이름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나, 이 신판은 이제 회화독본의 영역을 벗어난 것이었다. 플라톤이나 키케로나 루키아누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생생한 대화속에 에라스무스 본유의 사상을 표현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도가 뚜렀이 나타나 있었다.
나. “대화집”의 意義
이처럼 라틴어의 단순한 회화문집이 “대화집”으로 발전함에 따라서 분량은 더하고 풍자를 더욱 예리하게 하여 갔으며 여러 가지 제목이 각각의 대화에 붙여져 이었으나 제목과는 거의 무관한 비판.풍자가 그 내용으로 담겨져 있다. 그 속에는 일종의 역설적인 처세훈이나 사회의 여러개층의 사람들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치우.광기의 모습,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사건 속에 나타나는 넌센스의 반영이 대화라는 책임소재가 막연한 서술형식에 의거하여 그려지고 있다. 이리하여 1526년부터 “대화집”은 그 증보판이 나올때마다 거의 대개가 파리 대학 신학부(소르본)에 의하여 이단서로 고발당하여 출판금지 되었다.
천태만상의 인물이 등장하여 연애, 결혼, 여행, 종교, 정치 등 사회생활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하여 대담하는 “대화집”은 “바보신예찬”보다도 훨신 문학적이며 다채로운 희극적 소편집이라고 할 수 있다.
7. 結 言
“바보신예찬”을 “광명의 시기”에 있어서의 명쾌한 戱作書 라고 한다면 “대화집”은 “암흑의 시기”에도 쇠퇴하지 아니하는 에라스무스의 비판 정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풍자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1524년부터 마르틴.루터의 권유를 뿌리치고 구교회 측에 설 것을 명백히 한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파로부터서는 새삼스럽게 배반자인 양 비난을 받았으나 구교회측의 舊弊에 젖은 사람들로부터는 의연히 이단자로 지목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에라스무스로서 할 수 있었던 일은 구교회의 자기숙정을 바라는것뿐이였으므로 풍자의 형식을 빌어 “바보신예찬”과 “대화집”속에 그 뜻을 담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이 두 저서의 집필목적이었으며, 또 한 그 존재 이유인 것이다.
한편 에라스무스가 남긴 신학적 저술에 대하여는 전술한 봐와 같이 전혀 언급하지 아니하였으나, 1524년 발표된 “自由意志論(Delibero arbitrio)”은 에라스무스가 루터파의 권유를 뿌리치고, 그 태도를 분명히 하였던 때의 주요 저작으로서 르네상스기의 문화 사상의 귀중한 문헌이 되고 있다.
또한 에라스무스가 행한 성서의 교정 연구는 그 결과로서는 이미 그리스도교 교회에 의하여 소회된 것이였으나 인문주의 운동의 가장 순수한 그리고 원초적인 발현으로서 이것 또한 문화사상 잊을 수 없는 것임을 부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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